또 다시 지리산

2008. 8. 9. 11:07경상

천석들이 큰 종을 보아라.

어지간한 두드림엔 소리가 없다네.

어찌하면 두류산을 닮으리오.

하늘이 울어도 울지를 않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 남명 조식(南溟 曺植)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지리산 자락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기완성을 추구하였던 성리학자. 남명 조식의 한시를 멋대로 새겨본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요즘 같은 난세에는 더구나. 화엄사 앞에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걷는다. 여러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산,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로워진다던가?


세상 어떤 풍파에도 끄떡없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화엄사 마당에서 대충 머물다가 노고단으로 오른다. 오 리가 넘게 이어지는, 키가 큰 조릿대 터널을 휘적휘적 걸어간다. 꽤 오래 전 누구와 함께 이 길을 올랐던 게 생각난다. 비가 오락가락했었고, 노고단 대피소 언저리에 천막을 쳤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고, 투두둑투두둑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샜었다. ‘입산통제’로 쫓겨 내려오면서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다 맞았었다. 오늘, 맑은 하늘 아래, 그 길을 이렇게 걸어 올라간다.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란 말인가? ‘집선대’란 팻말이 서 있는 곳에 작은 폭포가 있다. 배낭을 벗고, 웃통을 벗는다. 떨어지는 물에 머리를 들이대고, 얼굴을 씻는다. 코재에 올라 섬진강 한 줄기를 바라본다. 좋다!


노고단대피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소주병을 챙겨 물가를 찾는다. 이 높은 곳에 이런 물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가. 사람들이 넋을 잃는 것을 두고 꼭 산과 물을 탓할 건 아니리. 발을 담그고, 최랑과 잔을 부딪친다. 마냥 좋은 시간.


올라가고, 걷고, 내려오기까지 백 리가 넘는 산길. 해발 14,00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 20여 개라는 산군. 사방으로 내리지르는 산줄기와 골짜기와 옆옆이 펼쳐지는 산허리들. 크고 넓은 모습에 어울리는 말을 찾지 못하겠으니 답답하다. 그래, 떠들지 말고, 그냥 보고, 그냥 걷자.


― 흙이 두껍고 기름져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다.

― 대나무가 많고, 감, 밤이 저절로 열리고 저절로 떨어진다.

―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부산(富山).


조선 후기 이중환이 지리산을 두고 한 말들. 과연 그러한가? 산은 이따금 흰 구름에 얼굴을 씻고, 뿌연 안개 속에 잠겨들곤 한다. 거센 비바람도 험한 눈보라도 다 품어내고 다 받아낸다.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골짜기들은 기름진 흙과 깨끗한 물로 수많은 동식물을 길러낸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터를 잡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풍성하게 거두어들인다.


어제 오늘, 지리산 하늘은 더 없이 맑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노고단이, 반야봉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흰 구름은 천왕봉을 애써 감추려고 하나 못 이겨 내놓곤 한다. 여름 지리산에서 이렇게 맑은 날씨,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종주를 하다니.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사람들은 지리산을 찾았다. 임진왜란 때는 난리를 피하고, 흉년이 없는 곳을 찾아 사람들이 들어왔었다. 혁명에 실패한 동학도들도 이 산에 들어와서 후일을 도모하였고,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의병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6 ․ 25 한국전쟁 때는 이현상이 이끈 남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골골, 봉봉마다 전쟁과 의병과 유격대들의 애환이 전설로 서려있다. 전설은 시로 소설로 회고록으로 되살아나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다. 이병주의『지리산』, 조정래의『태백산맥』의 주무대가 바로 여기고, 박경리가 쓴 『토지』의 주인공들도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마시고 자라난 사람들이다. 많은 나그네들이 지리산을 찾아 걷고 있는 지금은 어떤 세상인가?


7일 아침, 세석평전 공기가 선선하다.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쌀쌀해지면 집을 그리는 게 인지상정이런가? 전란의 시대에 고향을 잃고 타관객지를 전전하던 두보의 마음을 기웃거려 본다.


바람은 빠르고 하늘은 높아

‥‥‥

끝없이 늘어선 나무에선 나뭇잎 떨어지고

‥‥‥

끝없이 흐르는 강, 물결은 도도하고

‥‥‥

멀리 먼 곳 서글픈 나그네

‥‥‥

어려움과 고난 속에 귀밑머리 희어지고

늙고 허약해져 탁주마저 끊어야 하는가.

[두보(杜甫) / 등고(登高)]


지금은 가을도 아니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때도 아니다. 원숭이가 슬피 우는 소리도 물론 없다. 전국적으로 폭염주의보가 내려지는, 덥고 더운 계절이다. 세석평전, 높은 지대 이른 아침 공기에서 때 이른 가을 맛을 잠깐 느낄 뿐이다. 하긴, 한 세월 걸어가는 세상에 굳이 때를 가릴 일이야?


산을 찾고, 걷는 사람들. 좋다, 좋다 하면서 넋을 잃는 사람들. 왜 여기 와서 저러는가. 그리움인가? 세상살이에서 함께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그 어떤 것들을 찾고 싶어서인가? 그래서 저렇게 걷고, 바라보고, 찍어대는가? 그러나 이내 내려가야 하는 것을 ‥‥‥. 몇 백 년 전 어른 말씀에 토를 달아본다.


지리산 꼭대기에 커다란 종이 있네요.

우뚝 솟은 이마에는 흰 구름이 걸려 있고.

밀려드는 사람 물결 말없이 맞이하네요.

저 아래서 얻은 울음 그냥 삼켜 버릴까요?

(2008.08.08/최랑과 함께2박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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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

화엄사 - 코재 - 노고단(1507) 대피소

<8월 6일>

노고단대피소 - 424 - 1386 - 임걸령(1432/샘) - 반야봉(1732) - 노루목 - 삼도봉(1490) - 화개재 - 토끼봉(1533.7) - 1478.5 - 1542 - 명선봉(1586.3) - 연하천 - 삼각고지(1462) -형제봉(1433) - 벽소령 - 덕평봉(1521.9) - 칠선봉(1576) - 1556 - 영신봉(1651.9) - 세석평전(대피소)

<8월 7일>

세석평전(대피소) - 촛대봉(1703.7) - 연하봉(1667) - 장터목 - 제석봉(1806) - 통천문 - 천왕봉(1915.4) - 장터목 - 세석 - 한신계곡 - 백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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