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북천이 맑다기에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林悌)>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지만, 오전에 그친다는 예보를 믿고 집에서 나온 것이다. 직행버스를 타고 평동에서 내렸다. 제천시 백운면 소재지인 평동에서 방학리, 도곡리, 화당리, 덕동리로 해서 백운산 기슭을 헤집다가 운학리 용산골로 내려왔다. 덕동계곡 중간쯤에서 비는 그치고 동양화에서처럼 안개가 퍼진다. 이 골 저 골에서 물소리가 요란하니, 맑고 깨끗한 물이 풍부한 덕동계곡의 명성을 실감하게 된다.
임랑은 가끔 산에서 미인을 만난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술을 만났다. 오두재 못 미처, 그럴 듯한 자리에 술이 있었다. 한 잔 얻어먹을 요량으로 다가가는데 그 쪽에서 먼저 권주가를 부른다. ‘좀 여유를 부린 게 잘 한 건가?’ 선수를 빼앗긴 주제에 겉치레 사양을 하다가 거푸 두어 잔 받아먹었다. 답례 삼아 몇 마디 농을 주고받으니, 엷은 안개 속에서 신선주를 마신 기분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임도를 한껏 걸어 본 것인데, 호젓한 맛을 느끼느라 전혀 지루하지 않다. 어느새 운학리 용산골. 평동리까지 거리를 물으니 사십 리에 가깝단다. 차를 세 번 얻어 탔다. 이웃 마을을 왕래하는 농가 트럭들 인심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평동 버스 정류장 옆 장터, 막걸리 한잔으로 비 그친 늦가을 시골 저녁 정취를 돕고 싶었지만, 다른 승객들을 생각하는 모범적인 예의범절로써 참았다.
비는 그쳤지만, 안개가 남아 그 좋다는 백운산 조망을 제대로 감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눈 대신 귀로, 피부로, 다리로 얻은 게 있어 개운한 잠을 청한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寒雨)>
(200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