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와 바위와 사람[주왕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어 석병산(石屛山)이라고 부르던 산.
8 세기 경, 중국 당나라 주도라는 사람이 진나라 회복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이곳으로 쫓겨 와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당나라는 동맹국인 신라에게 이들을 없애달라고 했고, 신라 조정에서는 마 장군 다섯 형제를 보냈다. 주왕[주도]은 주왕굴에서 마일 장군이 쏜 화살에 눈을 맞고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산 이름을 주왕산(해발 721 미터)이라고 했다.
청송읍을 지나쳐 오면서 여기저기 주왕산 수달래죽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게 보인다. 수달래는 진달래와 비슷하지만 꽃잎이 좀더 붉고, 꽃잎마다 검붉은 반점이 깨알처럼 찍혀 있으며 어린 가지와 꽃자루에 갈색 잔털이 있다. 주왕이 죽을 때 흘린 피가 시냇물[주방천]을 붉게 물들였고, 이듬해 봄에 개울 가 여기저기에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것이 주왕산 수달래란다.
그러나 수달래는 아직 피지 않았다. 생강나무는 껌뻑이는 노랑으로, 진달래는 수줍은 연분홍으로 키 큰 나무들 그늘 아래 아주 조용하게 피어 있고, 회양목은 연푸른 꽃을 연푸른 잎에다 섞어 놓고 있는데, 수달래는 없다. 수달래축제 날짜가 이 달 마지막 주일(26일~27일)로 적힌 현수막을 봤으면서도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건 부질없는 아쉬움이리.
그렇게 주왕산을 넘었다. 칼등고개를 지나 후리메기로 내려가는데 소나무들이 예쁘다. 황장목, 춘양목을 떠올려 본다. 딱따구리 소리가 맑고 가볍게 산 공기를 흔든다. 아, 주왕산 소나무들은 봉화-울진 지역 춘양목과 같은 것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후리메기에서 한참 내려와 폭포 앞에 선다. 잡티 없이 단아한 맵시로 다가오는 제3폭포 앞에서 숨을 고른다. 저리 깔끔한 폭포를 본 지가 꽤 된 것 같다. 2층으로 된 제3폭포를 한참 쳐다본다. 오르락내리락 사진도 여러 번 찍는다. 오륙백 미터 아래에 있는 제2폭포는 또 다른 감탄을 끌어낸다. 폭포 중간에 둥근 홈이 있어 떨어지는 물줄기가 꼭 현악기의 줄과 같다. 그렇게 떨어진 물은 잠깐 고였다가 함께 어울려 흐르듯 떨어진다. 다시 몇 백 미터 아래에 제1폭포가 있다. 아쉽게도 바위에 막히고, 길에 막혀 떨어지는 물줄기는 아래 쪽 일부만 볼 수 있다. 대신 바위가 절경이다. 제1폭포에서 학소대로 이어지는 바위들을 어떻다고 말해야 옳을까? 작은 개울 양 옆에서 뒤틀리듯 날아갈 듯 벌여 서 있는, 거대하면서도 아담한 바위들이 빚어내는 저건 절정의 순간에 정지된 하나의 춤사위아고 해야 할까!
폭포와 바위가 연출하는 아름다움을 가슴 가득 담은 채 주왕굴로 간다. 결코 영원하지 않을 일생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살이. 반역이란 세상을 확 바꿔버리겠다는 것일 텐데, 주왕은 무엇을 어떻게 바꾸려고 했던 걸까? 일의 성패에 따라 반역이 되고, 혁명이 되고 하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떻게 바꿀 것인가?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주왕이 최후를 맞이한 주왕굴 앞에 주왕암(-菴)이 있고, 오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주왕이 무기를 간수하던 무장굴이 있다.
신록이 좋고, 수달래 꽃이 좋고, 단풍이 좋다는 주왕산. 신록도, 수달래도 아니고, 단풍도 아닌 철에 와서 물과 바위와 주왕을 보고 간다. 잠깐 들른 주산지, 왕버들은 이제 막 연두빛을 칠하려고 한다. 달기폭포 쪽은 출입금지다. 산불조심기간. 달기약수 한 바가지가 입안을 톡 쏜다.
08:35 주차장 - 대전사 - 주왕산 - 칼등고개 - 후리메기 - 제3폭포 - 제2폭포 - 제1폭포 - 학소대 - 주왕암 - 주왕굴 - 무장굴 - 대전사 - 12:20 주차장 -(승용차) - 주산지 - 충주 (200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