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가 억수로[능동산-재약산]
영남 알프스.
경상북도 청도군, 울산광역시 울주군, 경상남도 밀양시에 걸쳐 있는 산악지역. 이리저리 굽이치는 산줄기에 운문산, 가지산, 능동산, 재약산, 신불산 등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귀로만 듣던 곳을 어느 산악회 토요산행에 끼어 걷는다. 높이와 넓이와 웅장하게 펼쳐지는 산세에 감탄 또 감탄. 2008년 10월 25일.
알프스라는 말은 스위스라는 나라 이름과 함께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말이다. 푸른 산과 하얀 바위, 가끔은 하얀 눈이 뒤덮이는 곳이라는 상상.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공기, 깨끗한 자연환경의 대명사로 머릿속 한 쪽에 먼지처럼 앉아 있는 말.
석남고개에서 차에서 내려 잠깐 동안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나니 평평하게 이어지는 길. 해발 천 미터가 넘게 솟아 있는 봉우리들, 의젓하고 당당하게 뻗어가는 산등성이들. 먼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서 신작로처럼, 오솔길처럼 이어지는 길. 눈높이로 보이는 준수한 산세를 두리번거리며, 신선이라도 된 양 걷는다.
능동산을 지나면서부터 하얀 억새꽃이 많아지더니 이내 커다란 억새밭이 나타난다. 억새꽃은 햇빛 비치는 쪽으로 약간 비껴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다는 말을 듣고 눈여겨보니 과연 그렇다. 그냥 하얗게만 보이던 것이 맑은 햇빛을 머금어 은은한 빛을 조용하게 뿜어낸다. 새로운 감탄이다. 좌~악 펼쳐지는 억새밭 사이를 원 없이 걸으면서 가을 공기를 만끽한다.
이회장님께서 ‘억세다’라는 말이 억새에서 나온 말이 아니냐고 묻는다. ‘억새처럼 질기다’는 뜻이 아니냐고. 그럴 듯한 말이다. 자의적이라곤 하지만, 어떤 뜻을 담은 말이 생겨날 때에는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것. 그런데 오랜 세월 속에 애초의 사연은 잊혀지거나 사람들 머릿속에서 희미해지는 것. 그러다가 어떤 말의 유래가 무어냐는 본능적인 호기심으로 해서 어원에 대한 말이 무성해지는 것. 그래서 말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어떤 것이 정답이냐를 따지는 것이 때로는 우스울 때가 있는 것.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건가?” 최랑이 웃으면서 한 마디 거든다. 얼마 전, 대통령이 한반도대운하를 건설하겠다고 하여 말이 많았을 때, 어떤 사람이 문경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주흘산[主屹山]을 주월산[舟越山]으로 소개하면서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시켜서 배가 백두대간을 넘어 다니는 것은 조상들도 예견을 했다는 말. 충북 괴산군 박달산 앞에 주월산[舟越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고, 그 아래 있는 마을 이름이 배너미[주월 舟越]인 것은 알고 있지만, 문경 주흘산[主屹山]에 주월산[舟越山]이라는 이름이 또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몰랐던 것인지, 그 사람이 억지를 부린 것인지 헷갈리는 일인데, 그도 대통령 최측근으로서 목소리가 꽤 큰 사람이라던가?
지금 걷고 있는 산 이름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천황산, 재약산이라고 했는데. 사자봉, 수미봉이라는 말도 있다. 천황산과 사자봉, 재약산과 수미봉. 그래 한 마디 거들어 본다. “아, 산 이름은 재약산이고, 저 두 봉우리 이름이 각각 사자봉[천황봉], 수미봉[재약산]인 거예요.” 이런 말은 목소리를 크게 해서 말해야 하는 건가? 사자봉 아래에서 수미봉 아래까지 사자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수미봉에서 표충사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검은색 표지석이 있다.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터 1966년 4월 29일에 개교하여 졸업생 36 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에 폐교하였음』30년 동안 36명의 졸업생이라. 학교 건물 흔적은 전혀 없고, 아주 작은 마당이었을 법한 땅에 잡초가 우거져 있다. 저쪽에 있는 느티나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저 그늘 아래서 분교 아이들이 놀았을 것. 아, 서른여섯 명 중 한 사람쯤 만날 기회가 있을까? 마음속으로 막연한 바람이 한 줄기 인다.
표충사까지 2.9Km. 분교로 발령을 받은 선생님들, 분교 어린이들이 이따금 오르내렸을 길, 표충사 어귀에 고무다라에 도토리묵을 물에 담가 놓고 동동주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그냥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캬 ~ ! ㅎ ㅎ.
사방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매우 널찍한 마당, 신라 때부터라는 오래된 절집을 싸고 도는기운. 표충사 절 마다을 이리저리 거닐어 본다. 버스에 오르기 전, 도토리해물파전에 소주 한잔. 함께 어울려주신 유병귀 선생님, 최광옥 선생님, 오병만 기사님, 신종선 선생님, 이미옥 선생님, 임옥분 선생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자평 : 재약산 수미봉 아래 해발 800 미터 이상 되는 넓은 평원. 일제가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았었음. 1960년대 13 가구 고사리마을 형성.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는 마을 이름에 따라 고사리분교로 더 많이 불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