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리에서 막걸리 한 잔[형제봉]
경남 하동군 악양면 매계리 노전 마을에서 청학사로 가는 길,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져 눈이 부시다. 큼직큼직한 돌을 높이 쌓아 만든 논두렁들은 꼭 산성을 보는 듯하고, 바라다 보이는 형제봉 산등성이가 단정해 보이는 게 참으로 예쁘다. 맑은 공기에 씻기는 가슴이 가뿐하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가끔씩 바위를 타고 넘는 등성이길.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 풍경이 아늑하다. 흩어지고 모여 있는 마을과 논밭, 이리저리 갈라지고 만나는 구불구불한 길. 건너 편 산줄기는 이쪽과 함께 저 아래 분지를 감싸 안고 있다. 양팔을 벌렸다가 오므려서 양 손 끝을 섬진강 물줄기에 담그고 있는 모양새다. 섬진강은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받아들이며 말없이 흐르고 있다. 물가에 기다란 모래사장을 거느리고서.
악양면 전체가 저 안에 있다. 소설 ‘토지’ 속 사람들이 깃들여 오고 가며 삶을 꾸리던 곳. 풋풋한 꿈을 꾸고, 모진 한을 새기며 희비애환을 엮어가던 곳. 그들이 살았던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인가? 마을과 마을, 마을과 논밭으로 통하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길들이 자꾸만 눈길을 당긴다. 무슨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모내기 철 물꼬 싸움이 벌어지던 평사리 앞 들판은 경지정리가 되어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다
형제봉을 넘어 평사리 마을로 내려오는 길, 아침부터 찌푸렸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린다.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로다. 비옷 대신 우산을 받쳐 드니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한 소리, 투두둑 투두둑. 최참판댁 앞 주점에서 막걸리 한 잔씩 하는 건 당연한 일. 옛날 이곳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2010.04.18. ‘충주 산과산’과 함께 / 유병귀 최광옥 오병반 이호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