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살자[동강 거북이마을]
2012년 5월 27일(일)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동강 거북이마을을 다녀오다.
아침 아홉 시 좀 지난 시각, 신동읍 예미역 앞. 길가 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길을 물었다. 신동읍사무소 앞에서 우회전, 신동철물점 앞에서 좌회전 하여 ‘동강로’로 접어든다. 은근히 가파른 길이다.
여긴 이제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다. 토끼풀 엉겅퀴, 지칭개, 붓꽃, 조팝꽃 등등. 길가에 죽 나타나는 들꽃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는다. 여기 토끼풀은 거의가 보라색 꽃을 달고 있다. 몇 년 전 이르쿠츠크 앙가라강 가에서 처음 보았던 보라색 꽃. 잎은 토끼풀인데 꽃 색깔이 달라 신기했었던 꽃. “토끼를 불러 모으는 풀”이라던 비에라의 말이 생각난다.
엉겅퀴와 지칭개는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처럼 다가와서 한 움큼 그리움을 살짝 던진다. 둘 또한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는데 그 색깔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고 예쁘다. 아무래도 덜 오염된 청정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강원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첩첩 산중으로 들어가는 길, 산 빛뿐만 아니라 공기마저 그 깨끗함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유문동을 지나 고성리로 넘어간다. 고갯길도 있지만 터널 길로 들어선다. 저쪽 끝이 동그랗게 보이기는 하지만 굴 안에는 칠흑 어둠 속이다. 왕복 차선이 없고, 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굴을 완전히 통과한 다음에야 상대편 자동차가 굴속으로 들어온다. 자동차 불빛을 보고 벽 쪽으로 피해서 걸어간다. 마침 배낭에 야광표지를 매달아 둔 것이 있어 자동차 불빛에 내보이면서 걷는다.
그렇게 굴속을 걸으면서, 20여 년 전 삼탄역에서 명암으로 통하는 기차 굴을 빠지던 일을 떠올린다. 그땐 정말 무모했었다. 지금도 천사로만 여겨지는 어떤 사나이를 만나 무사했었지만, 만약 혼자였었더라면 캄캄한 굴속에서 분명 변을 당했을 것이란 생각에 아찔했었다.
여기저기 아카시아 꽃,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내리막길이 한참 동안 구불거린다. 자동차가 심심찮게 다니는 길가에 밭이 나타나고 집들이 몇 채씩 모여 나타난다. 드디어 삼거리. 정선으로 통하는 동강로를 버리고, 왼쪽 연포길로 들어선다.
고추 말뚝을 박고 있는 청년에게 인사를 하니 반갑게 맞아준다. “거북이마을이요?” “한 시간이면 되지요.” 걸어가느냐고 물으면서 살갑게 대해주는 청년에게서 티 없이 맑은 마음을 느낀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 깨끗한 자연 속에서 사람의 마음도 깨끗해지는 법이려니.
물레에서 뽑아져 나오는 실처럼 길게 이어진다는, 원덕천에서 연포로 넘어가는 물레재. 커다란 음나무 아래 성황당, 그리고 몇 구비를 돌아 내려가니 강이 나타난다.
동강! 물 건너 바위 절벽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상에나!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이야! 와! 어울리는 말을 찾지 못하겠다. 아니, 굳이 찾을 일이 있을까? 물은 어찌 그리 맑은지. 비경(秘境).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비경이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비경이다. 끝까지 알려지지 않았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잠수교를 건너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연포상회 간판이 보인다. 예미초등학교 연포분교였던 학교 교실을 민박집으로[연포생태체험학교] 꾸며 놓고 구멍가게와 식당을 곁들이고 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두 부부가 맡아서 일을 보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혼자서 먹을 수 있는 건 라면밖에 없단다. 먼저 시원한 맥주부터 한잔 한다. 맛이 그만이다.
같은 술이면서도 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가장 맛이 있는 온도가 있다고도 하지만, 그런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술 맛이다. 소주고 맥주고 차게 해서 먹는 맛이 좋다는 건 알지만, 분위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몸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게 술 맛이다.
같은 술이라도 달 때가 있고, 쓸 때가 있고, 떫을 때가 있다. 싱거울 때가 있고, 독할 때가 있고, 향기로울 때가 있다. 술 맛 떨어지게 하는 이야기, 술 맛 떨어지게 하는 놈, 술 맛 떨어지는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술 맛 기똥차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고, 사람이 있고, 경치가 있다.
오늘 이렇게 혼자 마시는 맥주 맛이 그만이다. 강원도 산골짝 오지에 꽁꽁 숨어 있는 ‘비경’, 두어 시간 남짓 걸어오면서 적당하게 땀을 흘린 몸 상태, 알맞게 시원한 맥주의 온도, 말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맛이 혀에 착 감기면서 온 몸에 감미롭게 퍼진다.
노란색 양은 냄비에 삶은 그대로, 깍두기 너덧 개와 김치 한 덩이를 한 접시에 담아 쟁반에 차려 내놓는 라면 맛 또한 꿀맛. 시원한 바람 맛을 더하여 한 때를 즐기다가 이 길 끝에 있다는 거북이 마을로 간다. 오 리 남짓한 길이다.
저만치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걷는다. 어라연이나 영춘의 물도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로 동강 맑은 강물이지만, 여기 이렇게 숨어서 흐르고 있는 동강은 참으로 맑다. 맑은 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 또한 맑다. 강변 모래도 맑고, 자갈도 맑고, 찔레나무 하얀 꽃이 여기저기 섞여 있는 강변 숲 또한 맑다.
소월의 강변이 떠오른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배로 저 강물을 건너는 것 외에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길이 없다는 가정 마을이 건너다보이고 민박집[거북이민박집]이 나타나더니 길은 끝이다. 거북이 마을이다. 그러니까 "거북이민박 1.2Km"이란 팻말 바로 뒤 숲속에 묻혀 있는 빈집과 이 민박집이 거북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길은 민박집에서 끝이다. 강으로 내려간다. 느티나무 아래 배낭을 벗어놓고 물가로 간다. 물에 씻겨 매끈매끈하고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같은 모양으로 누워 있는 강돌들, 곱디고운 모래, 날아갈 듯 솟아 있는 건너편 바위 벼랑, 가장 예쁜 색깔을 하고 있는 산 빛. 한참 동안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물소리를 듣다가 일어서서 왔던 길을 되짚는다. 돌아올 땐 고성터널 대신 고개를 넘는다. 왕복 60여 리. 모처럼 호젓한 걸음. 개운하다.
* 거북이 마을: 옛날에 어느 효자가 아버지의 무덤을 파다가 커다란 바위가 있어 들어냈더니 거북이가 나왔다고 하는 전설이 있음. 또, 산에서 마을 앞 백사장을 내려다보면 거북이 모양으로 보인다고 함.
* 예미초등학교 연포분교: 1969년 개교 1999년 폐교. 졸업생 169명. ‘선생 김봉두’ 영화 촬영지[2003]. 2009년에 수리하여 연포생태체험학교를 만들어 마을 공동으로 민박을 운영함. 텐트도 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