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힘없는 순환[대청봉]
2013년 1월 6일.
새해 첫 산행으로 대청봉에 올랐다. 한계령-끝청-소청-중청대피소-대청봉-오색. 지난 해 섣달 초부터 계속되는 매서운 추위가 오늘은 좀 눅는 듯하다. 바람도 잔잔한 편이고, 햇볕은 언뜻언뜻 봄볕처럼 다가온다. 겹겹이 이랑지는 하얀 봉우리들이 골골에 서려있는 하얀 연기와 어우러져 멀리멀리 너울거린다. 날씨 탓인지 휴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지가 않다. 가만 생각해 보니 행운이고 복이다.
대청봉을 처음 올랐었을 때도 지금처럼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땐 대청봉 정상 푯돌 바로 아래 대피소가 있었다. 장작 난로와 호롱불과 깜깜한 어둠과 어울려 하룻밤을 묵었었지. 지친 몸을 덜덜 떨면서 200여 미터 아래 있는 오두샘까지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일이 생생하다. 권오두라는 사람이 발견한 물이라고 해서 ‘오두샘’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지금은 흔적을 모르겠다.
2박3일 비박 산행을 했던 적도 있다. 남교리에서 십이선녀탕을 지나 귀때기청봉-끝청-소청-대청봉-희운각-공룡능선-오세암-백담사. 여름이었고 하염없이 오르고 내렸고 터벅터벅 걸었었다. 첫날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온산이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우리들 잠자리엔 이슬이 거의 내리지 않았었다. 아마도 맞는 기억일 것이다. ‘이런 곳이 바로 명당’이란 말을 주고받았었다. 끝청에선가? 작은 나뭇가지 위에서 교미를 하고 있는 뱀도 보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젊은이가 “해발 1000미터가 넘으면 뱀이 없다는데‥‥‥.” 하던 말도 생각이 나고, 그 젊은이의 웹사이트에서 그 사진을 찾아봤던 것도 생각난다. 다람쥐들이 손바닥에 올라와서 사탕을 물고 가기도 했다. 고놈들은 사탕을 양쪽 볼에 하나씩 두 개를 물고 어디론가 갔다가 다시 오곤 했었다.
지금 대청봉 정상에 사람이 없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사이에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이 지나갔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명산 설악산 대청봉에서 이렇게 한가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더군다나 휴일인데. 물론,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이따금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말이다. 최선생님이 복분자 술을 꺼낸다. 셋이서 호젓하고 오붓하게 잔을 부딪친다. 금잔으로 석 잔을 부딪쳤다. 캬~! 좋다.
우뚝 솟은 대청봉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서북능선, 용아장성, 공룡능선, 화채능선, 금강굴, 비선대, 울산바위, ‥‥‥. 한계령 건너 점봉산 그리고 사방 널리널리 퍼져가는 산 그리고 산. 저 아래 속초시내와 동해바다까지.
양지쪽 눈길을 내려오면서 봄을 그린다. 영하의 날씨라지만 바람이 없고 하늘은 맑아 포근하게 퍼지는 햇볕이 이른 봄에 언 땅을 녹이는 햇살처럼 따사롭다.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본다. 산에 서려 있다는 정기. 이따금, 높은 산에서 묘한 감정에 빠질 때가 있다. 옛 사람들이 말한 기(氣)에 대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던 중에 만났었던 한비야의 글 한 토막.
“‥‥‥ 이건 혹시 산에 있는 바위와 흙, 맑은 공기와 물, 나무와 풀,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크고 작은 동물들 사이의 막힘없는 순환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간섭이 없을 때 나타나는 광물, 식물, 동물의 자연스러운 교감, 그리고 인간인 나도 자연의 정복자나 이용자가 아닌, 그 일부로 자연의 진리 안에서 한 고리가 되는 일체감이 아닐까. 그 흐름 안에서 좋은 기를 주고받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것 같다.”
막힘없는 순환, 자연스런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