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국산[이천]
2023년 2월 16일 목요일. 하늘이 좀 흐리다. 눈이나 비 소식이 들리지만, 이천 지역에는 오는 둥 마는 둥 할 것이란 예보를 믿고 길을 나선다. 아니, 좀 오면 어떠랴. 오면 좀 맞지 뭐.
이천시 모가면 서경저수지 옆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운다. 가루눈이 날리는가 하더니 아주 잠깐만에 그친다. '마국산둘레길' 안내판 지도를 살피고 나서 걸음을 시작한다.
마국산: 이천시 모가면과 안성시 일죽면 경계에 있다. 마한의 산이라는 뜻이고, 마옥산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까지 산꼭대기에 검은색 말 동상이 있었고, 그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20여 년 전, 산마루에 헬기장을 만드는 공사를 하던 중, 흙으로 빚은 말(토용 말)들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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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면 주민 15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 '모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안내판 앞에서 잠깐, 그 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표정, 분위기. 그때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용광사 초라한 절집을 들러보고 간다. 작은 덩치 대웅전이 있고, 푸른 소나무를 머리에 인 바위에 부처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낡은 여염집처럼 보이는 요사채가 두엇 있다. 절을 창건한 사람, 몇 차례 절집을 손보아 보전한 사람들, 그 사연을 간추려 기록한 비석이 한쪽에 있다.
용광사를 지나 구불거리는 산등성이가 좀 낮아지는가 싶더니 마른 풀밭을 거느린 늪지가 보인다. 산속 늪지라. 물은 허옇게 얼었고, 이쪽에 하나, 저쪽에 하나, 멋들어진 소나무 푸른빛이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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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루에 이르는 마지막 오르막에서 숨을 헐떡이는데, 헬기 소리가 요란하다. 저쪽 하늘에 떠 있던 것이, 어느새 다가와, 내가 막 올라서려는 마국산 마루에 먼저 앉으려고 한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군복 차림이다. 전투용 헬기가 분명하다. 저 군인이 나를 발견한 듯하다. 공중 제자리에 머물면서 아래를 정찰하는 군 헬리콥터. 무장을 했을 것이고, 발견한 표적을 향해 정확하게 사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고, 무서워라.
헬리콥터는 나보다 한 발 앞서 산마루에 머물다가 날아간다. 거의 앉았었던 것처럼 보인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주제에 아쉬움을 느낀다. 말이래도 붙여 보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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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45m. 헬기장을 벗어난 한쪽에 푯돌이 있고, 가까운 명소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이쪽은 이천시, 저쪽은 안성시. 사방 너른 들판을 두루 내려다본다.
슬슬 내려가 볼까. 어, 저기 헬기가 또 이쪽으로 온다. 아니. 이렇게 빠른가. 급한 내리막길에 막 들어서자마자 산마루에 들어서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바람이 거세다. 흙모래, 가랑잎 등 온갖 티끌이 뒤섞인 바람이다. 아까 그 헬기가 분명하다. 그 군인이 이젠 나를 정면으로 내려다본다. 아이고, 무서워라. 영화에서, 소설에서, 역사책에서, 이유 없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헬기 소동에 이어 또 하나. 이럴 수가. 아무 생각 없이 내려오다 보니, 늪지가 보인다. 여기도 늪이 있네, 하다 보니, 그 늪이 아닌가. 하긴 이게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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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다른 길을 찾아볼까. 나뭇잎이 몽땅 떨어진 계절인 것이 다행이다. 출발 전에 담아 온 약도를 살피고, 지형을 살피고, 방향을 가늠하고, 한두 번 숲을 헤친 끝에 훌륭한 길을 찾았다. 이리저리 통하는 길에서 이정표를 따라 이쪽으로, 저쪽으로, 내키는 대로 다녀보고, 서경저수지 둘레도 한 바퀴 돌고. 그런대로, 서운하지 않을 만큼 걷는다. 10.4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