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길[합천 해인사 소리길]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 崔致遠
미친 듯 달리면서 바윗돌에 부딪혀 산을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도 알아들을 수 없으리
혹시라도 아귀다툼 소리 들려 올까 봐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감싸는가.
대강, 이렇게 새기면 되겠다. 최치원이 세속을 벗어나 가야산으로 들어설 때, 홍류동 물가 바위에 앉아 읊었다고 한다.
당시 어수선한 시국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를 산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어떤 소리였을까. 산에서 그가 즐긴 소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인간 세상에서 나는 소리 중 대표적인 게 정치권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닐까. 대놓고 악다구니를 주고받는 요즘 한국 정치권은 어떠한가.
산속에 파묻히면 그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려나. 아니, 아직도 그런 소리들에 연연하는가. 그냥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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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0일 일요일. 홍류동 물소리를 밟는다.
새소리, 벌레 소리, 바람 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풀이, 산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어울려 하나의 소리가 된다. 내 숨소리가 끼어든다. 나도 그렇게 하나가 된다. 그렇게 소리길을 걷는다.
가는 날이 장날인가, 가야만 장날인가. 가야 장날(합천군 가야면), 가야 장터에서 출발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난전을 펴는 이들은 대부분 꼬부랑 할머니들이시다. 호박, 오이, 고추, 호박잎 등 푸성귀들을 한 모둠 한 모둠 땅바닥에 진열하신다. 산초와 비슷하게 생긴 제피 열매도 나왔다. 어물전도 자리를 펴고, 튀김집도, 국밥집도 일찍부터 문을 열고 채비를 한다. 손바닥만 한 시골 장터를 두어 걸음에 둘러보고 물가 쪽으로 길을 잡는다.
잠깐만에 대장경테마파크이고, 소리길 출발점 이정표가 나온다. 길은 처음부터 가야천 맑은 물소리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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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윗돌에 부딪치고, 떨어지면서 하얗게 부서지고, 파랗게 고이고, 맑게 흐르는 물. 그 빛깔도 맑고, 소리도 맑고, 또 맑고, 맑다. 숲도, 그늘도, 공기도, 바람도, 맑고, 또 맑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맑은 소리, 맑은 빛과 함께 간다. 그러다가 치인리에서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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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테마파크를 지난 어디쯤에서 가야산 꼭대기 바위들을 바라본다. 곳곳에 명소를 안내하는 설명이 있고, 옛사람들의 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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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연못이 있고, 곤충 호텔이 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재미있는 이름이다. 목재를 이용하여 아파트처럼 다층으로 짜인 곤충 호텔. 생태 연못 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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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정엔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하여 말없이 서성이다가 그냥 간다. 최치원이, 첫머리에 소개한 한시를 지었을 곳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농산정, '농산'은 윗 시의 마지막 구절, 마지막 두 글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籠山. (물소리가) '산을 감싼다, 뒤덮는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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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땀을 쥐어짠 곳은 길상암.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호기심을 못 누르고, 가파른 계단을 오른 것이다. 올라서 보니, 과연 기가 막히는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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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거리는 숨을 고르고,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다가 적멸보궁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보았다. 망설일 일이 아니다.
아, 올라올 때와 똑같이 가파른 계단이 자꾸만 구불거리는 길. 이번엔 돌계단이다. 그러니까 길상암은 상상을 초월하는 벼랑에 붙어있는 절집이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지을 생각을 했고, 어떻게 지었을까. 덕분에 땀 한번 오지게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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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상암을 다녀오고,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넌다. 서두를 일도 없지만, 이제는 세월아 네월아, 걸을 수밖에 없다.
폭염 경보가 내린 날씨에 산속이고, 숲속이고, 물가인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치인리에서 숲을 벗어나 식당을 찾을 땐 가마솥 더위 속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배가 든든한가. 다시 오르막길을 기어 올라 해인사 일주문에서 길을 접는다. 11.62Km.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