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박용길 여사 영전의 감회/ 고은

2011. 10. 4. 19:37저런

기어이 가시는구려

 

봄길이시여

봄길이시여

늦봄 문익환의 길

봄길 박용길이시여

굳이 슬픔도 소용없습니다

 

돌아보니

어이 그리도 하나이셨는지요

이른 봄 늦은 봄이 여름으로 가고

가을로 가고

겨울로 오고

또 봄으로 오는길

내 나라 산천 철철의 길

그 길 밖에 또 어느 길이셨는지요

 

어이 그리도 둘이셨는지요

누가 누구의 것 아니고

누가 누구의 하나로 사그라지는 것 아닌

서로 높여

서로 높고

서로 낮춰

서로 낮고

정녕 끝간데 모를 둘로 엄연하셨지요

 

사랑일진대

이러하올세라

아니 아픈 동지일진대

비바람 속

그러하올세라

문익환이 곧 박용길

박용길이 곧 문익환

그러하고 그러하올세라

 

지난 날

가시버시 5년만 살다

누가 마저 죽어도 좋다시던

그 젊은 날의 간절한 사랑으로

이 세상 모질고 눈부신 날들을

이토록 잘도 살아내셨지요.

과연 몇 십 년을

몇 백 년으로 살아내셨지요

오늘 한동안 소리 하나 없는 대낮에

무슨 미완이 남았으리오

 

봄길이시여

당신은 늘 사사롭지 않으셨지요

골방의 나 하나도

틀림없이 남남 속의 그것이셨지요

한밤중 잠결에도

무심코 여럿의 마음이셨지요

당신의 지극정성 궁체글씨

한 자

한 자 새겨나가는

내 겨레의 넋들이

꿈틀꿈틀 살아나셨지요

 

속옷 한 벌 새 것 없는 삶에도

마음은 늘

금방 돋아난

아침 이슬의 새 잎사귀셨지요

 

늦봄하고

봄길하고 나서는 길

문익환하고

박용길하고 나서는 길

아무리 꼭 막아서도

거기 반드시 문 열리는 꽃

활짝 피어났지요

 

봄길하고

늦봄하고

마주 앉아 밥 먹는 방

아무리 고단한 하루일지나

여기 싱싱한 새 각시같은

새 서방같은 향내

문밖으로 번져났지요

이제 가시는구려

가서

함께 누워

흙이 되고

하늘이 되는 거기 가시는구려

 

웬일인지 슬픔도 필요없습니다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