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속에 떠나다[남해-거창]

2008. 2. 27. 11:23동서남북

봄이 되어 얼었던 대지가 녹으면, 사방에 물기가 흠뻑 번지면서 온 세상은 기지개를 켠다. 부지런히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물오른 버들개지 그림자가 아른거리면 시냇물은 더욱 가볍게 노래를 한다. 돌돌돌. 곳곳에서 움이 트고, 새 잎이 나고, 꽃이 핀다. 새소리가 경쾌하고, 개구리가 물속에 알을 낳는다. 아, 봄이 온다!



― 남해에서 봄을 맞아 등에 업고


2006년 1월 31일. 남쪽나라 남해 미조항에서 새벽밥을 먹고 나선다.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그냥 맞을까? 안되겠다. 다들 비옷을 꺼내 입는다. 이슬비 내리는 남해 바다 풍경이 좋다. 망망한 물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 세 나그네. 산에도, 길에도, 바다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아주 차분하게 내리는 봄비! 비가 내리면 괜히 좋다. 속으로 흥얼거려 본다.


雨歇長堤草色多 비 갠 뒤에 긴 언덕에 풀빛이 짙어 오는데,

送君南浦動悲歌 그대를 남포로 송별하니 슬픈 노래가 나오네.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르리오.

別淚年年添綠派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는 것을.  ― 송인(送人)/정지상(鄭知常)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

그 때 그날은 그때 그날은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시간 너무나 아쉬워

서로가 울면서 창 밖을 보네. 헤~에·에~에.

봄비가 되어 돌아 온 사람 비가 되어 가슴 적시네.   ― 봄비/이은하 노래


이별을 노래했다? 그런 것 보다는 배경에 봄비가 있다는 것, 그것이다. 비도 물, 술도 물, 눈물도 물이다. 물은 뭇 생명의 원천이다. 서러운 이별에 눈물이 나고, 아쉬운 만남이 비가 되어 적신단다. 서러움과 아쉬움을 겪은 눈물은 끝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것이니 슬퍼만 할 일이 아니렷다. 빗물이 번지듯 가슴 속에 번지는 그 무엇이 좋다. 술로 비를, 물로 물을 도우면 더욱 좋겠지. 그래서 점심 반주로 한잔 한다. “캬~!”


빗속을 걸어가는 저 나그네.

세상만사 비옷 속에 씻는구나.

뚜벅뚜벅 그 걸음 언제 끝나리.

때가 되면 저도 몰래 봇짐 꾸려 나서는 걸.



― 걸어가며 사랑을


미조항에서 자연산 잡어들을 뼈 그대로 채를 친다. 삼천포항 재래어시장에서는 뼈를 발라내고 썬다. 진주 중앙시장에서 막걸리를 따르고, 산청 재래시장에서는 누룩 넣어 빚은 맑은 술을 따른다. 어느 것이 제일이다 가려본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미조, 작은 면소재지 어항을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가 아늑하다. 삼천포를 대표하는 먹거리를 저렴하고 싱싱하게 내놓는다는, 삼천포 어항 시장 아줌마의 자부심에서 억세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꿋꿋한 삶을 본다. 진주성과 남강. 어느 시인이,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하고 읊은 논개의 충혼이 음풍농월하던 사람들의 흔적에 묻혀 있다. 촉석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는 “좋다!” 한 마디 깊게 토하고 내려온다. 대한민국 어느 도시에나 있는 ‘중앙시장’을 찾아 순대집 할머니에게 막걸리를 청한다. 유구히 이어져 내려오는 삶의 현장 ‘장터’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당면하고 있는 삶의 이야기, 학교 얘기에 세상이야기를 나눈다. 정말로 산골에 꽁꽁 숨어 있는 산청읍에도 재래시장이 있다. 퇴근길에 한잔 걸치는 듯한, 바바리 차림의 주객들 틈에서 우리도 한 잔 한다. 한두 마디 건네는 말 속에 산골 사람들의 인심을 있는 그대로 내비치는 젊은 주인댁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도록 순박하고 씩씩하다.


남해에서 거창까지 5박6일. 낯선 산과 물과 바람에 취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취하였다. 그 취기와 함께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산과 물과 바람에 대한 사랑,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들에게 가는 사랑, 그들로부터 오는 사랑. 그래서 도보사랑.

 <2006.02.04>


<전체 일정>  ― 1월 31일 새벽 남해 미조항 - 2월 1일 삼천포 - 2월 2일 진주 - 2월 3일 거창


1월 30일(월/정월 초이틀 맑은 후 흐림)

충주 범바위에서 11:00 승용차로 출발-(대전통영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남해읍 금산-미조항-전야제-숙박


1월 31일(화/비오고 흐림)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미조항-항도(잠깐 휴식)-삼동면 물건리(방조어부림/천연기념물)-동천리-지족리(점심)-창선대교-창선면 수산리-동대리-당항리-대벽리-삼천초시 늑도동(창선·삼천포대교/늑도-초양도-모개섬)-삼천포(재래시장)-숙박


2월 1일(수/흐린 후 맑음)

삼천포-죽림동-덕곡리-용현면 송지리-신복리-사남면 죽천리-사천읍 수석리(점심)-축동면 사다리-진주시 정촌면 예하리-가좌동 경상대 앞-칠암동 진주산업대 앞-진주성(촉석루/중앙시장)


2월 2일(수/맑음. 바람 불고 몹시 추움)

진주성-명석면 용산리-외율리-산청군 신안면 하정리(점심/신안식당 추어탕)-신안리(도천서원)-외송리-산청읍


2월 4일(목/맑음. 바람 불고 추움)

산청읍-오부면 양촌리-생초면 어서리-수동면 화산리(점심/유병귀 선생님 합류)-죽산리-거창군 남상면 춘전리(춘전고개)-진목리-둔동리-오계리-무촌리-거창읍


2월 5일(토/맑음. 몹시 추움/입춘)

아침 일찍, 거창에서 승용차 출발-김천에서 아침식사-(중부내륙고속도로)-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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