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중국유적지답사

2013. 7. 31. 15:37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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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충주버스터미널. 인천행 버스에 오르는 머릿속에서 노랫가락이 잔잔하게 흐른다. 장보고 중국유적 답사를 떠나는 길이다. 1,200년 전에 살았던 장보고, 신라 사람이고, 당나라에 가서 군인으로 성공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하여 무역왕으로, 해상왕으로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았던 사람. 뚜렷하게 그려지는 것도 있고 안개 속에 묻힌 듯 어렴풋한 것들도 있다.

 

어느새 날씨는 개었고, 인천항제1여객터미널에 왔다. 5박6일 여정에 오른다. 2013년 7월 24일이다.

 

배에 올라 짐 정리에 이어 저녁 식사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선상세미나가 이어진다. “21세기에 왜 장보고를 주목하는가?” 부산외국어대학교 권덕영 교수가 장보고의 메시지를 ‘바다의 중요성’, ‘해외무역의 무한한 가능성 제시’, ‘해상활동을 통한 세계화 추구’ 이렇게 셋으로 정리하여 말한다. ‘중요성’과 ‘가능성’과 ‘세계화’‥‥‥. 완도에서 당나라로 건너가는 장보고와 그의 친구였다는 정년의 심정을 그리며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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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흔들리는 배 안에서 눈을 떴다. 중국 시간으로 4시가 좀 넘었다. 망망한 바다 가운데서의 해돋이를 그리며 뒤척이다가 사진기를 들고 갑판 위로 나선다. 바람은 세차지만 부드럽고 풋풋하다. 저쪽이 좀 훤한가? 느긋하게 기다리다 보니, 벌겋게, 또렷하게, 두둥실 떠오르는 동그란 해님. 1,200여 전 이 바다를 건너다니던 사람들도 저 해님을 보았었겠지.

 

짙은 안개로 예정보다 두어 시간 늦게 석도항에 내렸다. 배가 고프다. 버스로 100Km쯤 달려 위해(威海) 항에서 점심을 먹고 유공도(劉公島)로 건너간다. 중일갑오전쟁박물관(中日甲午戰爭博物館)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청일전쟁을 중국에선 중일갑오전쟁이라고 한다. 청나라는 ‘침몰하지 않는 전함’이라 할 정도의 요새에 첨단 장비를 갖추었으면서도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준비와 훈련이 부실하여 참패를 했다. 그 후, 정치 상황이 비슷했던 조선과 함께 청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섰고, 예상 밖의 승전을 거둔 일본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치욕스럽고 기억하기 싫을 역사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재현하여 교육의 효과와 더불어 관광수입이라는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중국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더듬으면서 모스크바에 있는 전승기념관과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주요 도시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을 떠올려 본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넋들을 기리는 국가 차원의 방식과 자세에 대한 그 때의 느낌을 다시 불러본다.

 

해전에서의 승패와 그 후유증. ‘바다의 중요성’인가? 그래서 장보고인가? 아득한 옛날부터 중국과 한반도의 주된 교통로 역시 발해와 황해를 건너다니는 바닷길이었다는 설명을 떠올리면서 자정 무렵이 되어 오늘 일정을 접는다. ‘안개’ 때문에 늦어진 잠자리, 곤한 몸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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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답사 셋째 날. 이른 아침을 먹고 100Km쯤 달려 치박에 왔다. 고차박물관과 강태공 사당을 둘러본다. 고대 차량 전시물과 제나라 시조 강태공의 사당. 산동반도가 중국 고대사의 주요무대였다는 사실과 그 산동반도가 한반도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그러고 보니 바닷길을 그저 두려워만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와서 태산(泰山)을 외면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일정에 태산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오늘 오후 일정이다. 걸어서 오르는 게 아니고 케이블카를 이용한다는 게 좀 싱겁기는 하나 즐거운 마음으로 오른다. 석도항 입항을 막아서던 안개가 산으로 왔나? 케이블카에서 내려 걷는 태산 꼭대기는 온통 안개 속에 묻혀 있다. 안개에 싸인 태산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바위들은 모두 붉게 새겨진 글씨투성이이다. 천하의 명산에 오른 감회를 감추지 못하여 새겨놓은 글씨들은 또 하나의 명물이 되어 해설가들의 입을 달군다. 청나라 강희제가 새겨 놓은 ‘果然’ 두 글자 앞에서 ‘과연’ 하고 멈춘다. ‘태산은 과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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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순마갱과 제나라역사박물관. 옛날 산동반도에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었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치박시 임치구에 순마갱과 제나라역사박물관이 있다. 답사 넷째 날 아침나절엔 박물관에 들러 춘추전국시대 강국이었던 제나라 역사의 화려함을 그려보고, 청주(靑州)로 이동하여 청주박물관을 본다. 청주박물관에는 용흥사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있다. 용흥사는 교통의 요지인 청주의 주요 사찰이었고, 청주 신라원에는 당나라 불교 성지를 찾는 구법승이나 여행자들을 위한 법당이 있었을 것이기에 장보고의 발자취가 당연히 남아 있을 것이지만, 아직 확실한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숙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석도로 간다. 380Km 버스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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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정 중 가장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감았던 눈을 뜬다. 7월 28일이다. 가벼운 산책 후에 아침을 먹고 산동반도에서의 마지막 일정에 오른다. 적산법화원에 왔다. 답사에 앞서 세 분 교수님들의 간략한 강의를 듣는다. “적산법화원은, 근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있어 한인교회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나라에 건너온 신라인들을 교화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교육의 장이었고, 삶의 안정과 번영, 항해의 안전을 기도하는 기도처였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장보고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적산범화원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께서 정리하신다. “적산 범화원은 배타적 민족성을 지양하고, 코스모폴리턴을 지향하라는 교육의 장이요, 동아시아 3국의 화합과 교류의 장이고 평화의 장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중국을 방문할 때, 한 번쯤은, 이곳에 와서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던진다면? 참으로 의미 있고 멋진 일이 될 것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법화원은 석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적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1972년에 절터를 발견하였고, 1989년에 재건하는 과정에서 장보고가 세운 절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당나라에서 구법하고서 귀국하려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이 이곳에서 머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 기록이 전한다. 845년 8월에 엔닌이 다시 법화원에 왔을 때는 사찰이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당나라 무종이 840년 10월부터 사원철폐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법화원은, 연간 5백 섬의 알곡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을 경제적 기반으로 운영하였고, 불당을 비롯하여 2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2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승방과 수 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방, 그리고 장경각, 식당, 창고, 종루가 있었으며, 비구 24명, 비구니 2명, 노파 3명 등 29명 상주하였었다고 한다.

 

장보고기념관에는 5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 정자, 장보고 동상 등이 있다. 전시실은, 1.꿈을 찾아 당나라로, 2.무령군 종군, 3.적산과의 인연, 4.청해진의 부침, 5.유구한 역사, 다섯이다. 최수종이 주연을 한 드라마 ‘해신’의 한 장면이 반갑게 맞는다. 시원한 바다를 시원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적산명신상 옆에 올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씻는다. “와! 명당이다.”라는 말이 절로 터진다. 저쪽 법화탑 음악분수대 분수가 하얗게 춤을 추고 있다.

 

세 시간 남짓 법화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석도항으로 저녁 배를 타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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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에 올랐다. 집으로 간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몇 해 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나서 카투만두 시내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하늘은 뿌옇고, 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나고,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사람이 뒤범벅되어 넘실대고 있었다. 아무도 짜증을 내지 않고, 아무도 급히 서두르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을 하고, 남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 때, 네팔과 네팔 사람들, 카트만두와 카트만두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었다.

 

지금, 장보고중국유적지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배 위에서 바다를 본다. 끊임없이 출렁이는 망망한 바다. 1,200여 년 전 저 바다 위에서 꿈을 펼치던 한 영혼을 그려본다. 체념하고 순응하기보다 꿈을 가지고 현실을 개척해 나갔던 삶을 더듬어 본다. 동아시아 바다에서 국제적 교류와 평화를 일구었던 코스모폴리탄을 그려본다. 노래가사 끝 부분을 바꾸어 본다.

 

마지막 한 가지 남아 있는 것

이제는 알 수 있나 당신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