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길[울진-충주-만리포]

2008. 2. 26. 08:44동서남북

2005년 1월 21일. 계명산 봉우리 위로 해가 떠오르자 탄금대교를 막 건넌 일행 셋이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 든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발엔 신선함과 찬란함이 넘쳐나고, 자욱한 안개에 뒤덮인 호수에선 계속해서 김이 솟아오른다. 호수와 해돋이와 안개가 연출하는 장엄한 광경에 취한 셋은 길을 재촉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 충주시청 앞에서 출발한 이들은 지금 서해바다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 오늘은 음성 맹동까지 갔다 오고, 27일엔 거기에서 천안시 입장까지 갔다 온 다음, 2월 1일부터는 3일간 계속 걸어 2월 3일 일몰 전에 태안반도 만리포 해변에 도착하게 된다. 27일부터는 한 명이 늘어 넷이 갈 것이다. 


 

-  충주에서 울진, 충주에서 만리포.


 지도 위에다 충주에서 만리포를 잇는 직선을 긋고, 그 선에 가장 가까운 길을 찾아 걸었다. 지난 해 이맘 땐 울진까지 그렇게 했었다. 국도를 따라가기도 했고, 옛 나뭇길 흔적을 찾아 산을 넘기도 했다. 징검다리조차 없는 곳에선 맨발로 찬물을 건너기도 했으며, 논밭을 가로지르기도 했고, 하천 둑 갈대를 헤치기도 했다. 지도를 잘못 읽어 헤맨 일도 꽤 있었다. 밥을 구하지 못해 찬 음료수에 빵 한 조각으로 요기를 한 적도 있었으며, 잠자리를 찾느라고 어둔 밤길을 헤맨 때도 있었다. 저녁엔 어김없이 반주로 노독을 풀어내며 낭만에 빠지기도 했다. “왜 걷는가? 왜 사는가?” 유물이나 유적, 명승지를 찾아 견문을 넓히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일단 걷는 것 하나에 의의를 두자고 했다. 그러나 발 닿는 곳 어디인들 자연의 숨소리가 없을 것이며, 감탄이 없을 것인가! 도회지든 시골 마을이든 세상 어느 곳이나 나름대로의 풍경과 삶이 있을 것이니 그 모습에 젖지 않을 수가 있으랴! 

 

 

- 울진까지.

 

동쪽으론 산지가 많아 험한 고개를 많이 넘었고, 한참 동안 인가가 뜸하기도 했다. 골골마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들이 많아 이농이 한창이던 시절을 그리며 무상함을 느끼곤 했다.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면소재지는 아니지만 기차역이 있고, 그 바로 앞 장터거리엔 여인숙 간판, 식당 간판, 상점 간판이 여럿 있었건만 점심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문을 연 상점도 슈퍼 두어 군데 정도일 뿐 적막하기만 하다. 이 골 저 골에서 나들이옷 챙겨 입고 몰려드는 장꾼들이 꽤 있었을 법한 거리에 사람 그림자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겨울 한낮 햇빛만이 고요하다니!

 

 

- 먹고 잘 일이

 

어쩌랴. 지도를 펴고, 최대한 빨리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니 울진군 서면 광회리 정도. 조금이라도 빨리 갈 요량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동장군의 기세에도 얼지 않은 여울물에 맨발로 들어섰다. 물을 건넌 다음 신발 끈을 매긴 했지만 내 살은 아닌 성싶다. 험한 꼬비치재 정상에 올라 지름길을 찾아 골짜기를 미끄러져 내려가 보니 개울 얼음 중간 중간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사이로 급물살이 노래를 한다. 그냥 건너기엔 겁이 난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지팡이를 거머쥐고 온 몸으로 살살 기어 도하에 성공! 물가 흙길을 한참이나 걸어, 광회리 오루숲에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었다.

 

 

울진군 서면 쌍전리에선 숙소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웃 동네인 삼근리 새점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간판이 붙은 몇몇 민박집은 여름철 피서객들을 위한 방이 있지만 지금은 다른 물건들을 쌓아놓은 데다 난방이 되지 않는단다. 날은 어둡고, 춥고 배고프다. 물어물어, 전화도 걸어 보고, 갔다 왔다, 왔다 갔다. 우여곡절 끝에 한 집에 들어 밥을 얻어먹고 떨어져 잤다. 

 

 

밤새 흰눈이 내렸고, 바람이 매서웠던 이튿날, 불영계곡을 굽이굽이 내려가면서, 지금은 얼어붙은 골짜기의 봄을 그리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 땅 속에서, 바위 틈바구니에서, 나뭇가지에서 움이 트고, 새싹이 돋는다. 싼 꼭대기 눈이 녹고, 얼음이 녹아 시냇물 소리는 더욱 경쾌하다. 버들개지는 돌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방울에 흔들거린다. 사방에 물이 올라 곳곳이 파릇파릇, 지저귀는 새소리에 나비가 날아다닌다. 노오란 개나리와 붉게 번지는 진달래. 온갖 꽃들은 아지랑이와 어울려 봄볕 속에서 더 없이 화사하다. 찬양이다! 향연이다! 골짜기 가득한 봄을 그리며 설레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어렵다. 걷고 또 걸으면서 한 없이, 한 없이 탄식한다.

 

 

- 만리포로 가자.

서쪽은 평야가 발달하여 인가도 많고 길도 좀 편했지만, 시골에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겨울이라 바깥출입을 잘 안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몰려다니는 꼬마들은 더러 있을 법도 하건만……. 길을 물어볼 사람을 만나지 못해 어림잡아 가다가 따져 보니 한참을 잘못 온 게 아닌가? 지도를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탓하면서도 황당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구릉이나 평지에 길이 여러 갈래이다 보니 헤매기 쉬운 만큼 바로잡기도 쉬워 크게 어긋남 없는 길을 새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없어진 산길이나 아예 없던 길을 새로 내 가면서까지.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은봉산 안국사지에는 삼존입상석불과 석탑이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무상한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무상한 건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을! 석불 3구는 보물 100호로, 석탑은 보물 101호로 지정되었으며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안내판의 설명이다. 몇 걸음 더 가니 안국지라는 저수지가 나온다. 산은 물을 안고 있고, 물은 산을 담아내고 있는데 골바람에 나부끼듯 춤추는 눈보라가 정취를 더해준다. 저수지 바로 밑 옆에 펼쳐진 계단식 논이 꽤나 인상적이다. 큼직한 집을 한 채 멋들어지게 지어놓고 낚시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사람, 주고받는 얘기 속에 제법 산 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은봉산장(隱鳳山莊) 주인장이 커피 한 잔을 권한다.

 

아산시 인주면에서 꼭두새벽에 삽교호방조제를 건넌 것도 잊을 수 없는 길이다. 새벽 반달이 공중에 있을 뿐 좌우가 캄캄하고 찬바람이 매서운 때, 저 쪽 식당으로 일을 나간다는, 방한 채비를 단단히 하고 빠른 걸음을 재촉하던, 어둠 속 아주머니의 삶을 엿보았다. 서해대교 가로등을 저 쪽에 두고 십리길 방조제를 건너다보니 날이 밝아온다. 

 

- 아아!  걸어가는 길에는....


시속 300 킬로미터 고속 전철이 달리고, 지구촌 곳곳을 안방 다니듯 하는 세월에도 산골 마을에선 장작을 쪼개어 담벼락 세우듯 쌓아 놓고, 가을걷이 끝난 지 오래인 텃논 바닥엔 닭들이 이삭을 찾아 모이를 쪼고 있다. 마을 어귀에 쌓아놓은 볏짚더미에선 타작마당에서 김을 내던 흰 쌀밥 냄새가 아직도 나고 있다. 인생이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가는 여정은 어떤 것인가. 동해 바다 울진으로, 서해 바다 만리포로, 하염없이 걸어가는 길가에는 고속 전철도 있고, 가랑잎 쌓인 나뭇길도 있다. 김 숭숭 나는 순두부도 있으며, 중국집 자장면도 있다.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온갖 자동차가 질주하는가 하면 볏짚가리 옆에서는 농한기 경운기가 겨울바람을 벗 삼아 쉬고 있다.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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