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8. 22:28ㆍ충청
3월 8일 일요일. 아침나절, 집에서 푹 쉬고 있는데 머릿속에 하나의 길이 떠오른다. 장연면 방곡에서부터 주월산 밑을 한 바퀴 빙 도는 길. 간곡에서 고개를 넘으면 배너미 마을. 그리고 아시리 마을, 이담저수지, 백양리, 박달 마을을 지나고, 느릅재를 넘어 방곡리 출발했던 곳까지. 가벼운 차림으로 나서니 봄볕이 바람을 타고 와서 온몸을 간질인다.
한겨울에 땅속 깊숙이 숨어 있던 봄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온 세상에 가득 찼다.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퍼지는 봄. 아지랑이는 겨우내 세상을 덮고 있던 검은빛과 회색빛을 슬금슬금 날려 보낸다. 곧 분홍빛, 노란빛, 빨간빛 등등 한바탕 잔치마당이 요란할 것이고, 이어서 온통 푸른 물결이 일어날 것이다.
배너미 고개를 넘는다. 밖에서 잘 안 보이는, 산이 갑자기 푹 꺼진 것 같은, 희한하게도 낮은 고갯길을 잠깐 사이에 넘으니 배너미 마을이다. 배너미[舟越]라는 마을 이름은, 먼 옛날 커다란 물난리가 났을 때, 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배너미고개 舟越嶺]로 물이 넘쳐 방곡마을까지 배가 넘어 다녔다고 해서 붙었단다. 양쪽 산 높이에 비에 턱없이 낮은 고개를 넘고 보니, 무지하게 큰 홍수라면 정말로 물이 넘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는, 마을 앞에 흐르는 강[달천강]에 소금배가 다니던 때, 이웃 여러 마을 사람들이 잡곡을 가지고 와서 소금과 생선, 생활용품 등을 바꾸어 가는 통로라는 뜻으로 배너미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옛날 사람의 선견지명을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달천댐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을 편드는 사람들인데, 달천댐을 만들거나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시켜 뱃길을 만들면 이 고개가 물에 잠길 것이고 배가 다닐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선견지명이냐는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사물의 이름이고, 사람들의 생각이고,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아니,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섭리가 있을 것이다.
개울가에서 놀고 있는 꼬맹이 셋은 남매간이란다. 배너미에서 강 건너로 보이는 하문리, 서쪽으로 이담, 그 옆에 대상동 등등 강가에 펼쳐지는 작은 벌판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둘러보면서 걷는다. 여기저기 논밭에서 폐비닐을 걷어내는 사람들, 냉이를 캐는 사람들이 있다. 장거리를 들고 걷는 이들은 저쪽에 달리고 있는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다. 겨울가뭄이 길었지만 이담저수지에는 제법 많은 물이 고여 잔물결을 출렁이며, 박달산을 비춰낸다. 물 저편에 죽 이어지는 마을들은 곤동과 백양리이고, 박달산 기슭으로 올라가면서 박달 마을이 이어진다.
박달 마을, 비탈진 길을 기어올라 느릅재를 넘는다. 오른쪽이 박달산, 왼쪽이 주월산이다. 봄철 산불조심 기간, 붉은 글씨, 불조심 깃발들은 바람에 펄럭이고, 주월산 산불감시초소는 바위벼랑 위에서 한 멋 하고 있다. 낯설지 않은 산과 마을과 길이지만, 한 바퀴 빙 돌아보니 새롭다. 다리가 좀 뻐근한 건가? 걷게 해줘서 고맙다는 애교어린 인사말 좀 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