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21. 21:35ㆍ충청
대한민국 땅 곳곳에 옥녀봉. 내가 살고 있는 충주에서 가까운 곳만 해도 이류면 수주강 가에, 앙성면 오갑산 앞에, 괴산 갈론계곡 위에 옥녀봉이 있다.
2월 21일 토요일. 느지막하게 일어나 늦은 아침밥을 먹고,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옥녀봉으로 간다. 하천리 옥녀봉 골짜기에는 상탕, 중탕이 있었는데, 상탕에는 옥녀가 내려와서 물을 마시고 목욕도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중탕의 물을 마셨는데,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샘 앞에 서면 물이 흐려져서 먹을 수가 없었단다. 토정 이지함이 이 산 아래 기거할 때, 밝은 달빛을 타고 내려오는 옥녀를 보았다던가? 재미있는 이야기.
충주호 리조트 뒤편에서 올라가는 길에는 엊그제 내린 눈이 그대로 있어 미끄럽다. 그저 따뜻한 봄날이려니 하고 채비를 하지 않은 탓에 어린 나무 줄기까지 부여잡으며 씨름한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나뭇가지 사이로 사방이 멀리까지 보인다. 저쪽 삼탄에서 인등산 밑을 따라 흐르다 정암마을 앞 굽이를 돌고, 하천교를 지나면서 이 산을 감싸는 제천천은, 좀 더 돌아 남한강과 만나 충주호와 하나가 된다. 양 옆에서 물비늘들이 반짝이고, 고봉 너머에, 청풍 쪽에, 이쪽저쪽에서, 크고 작은 산봉우리 사이사이에 물이 고여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래 이런 게 그리워서 나온 거다. 인사이동 철을 맞아 송별회 덕분에 마셔대는 술, 그것도 짧은 기간에 잦다 보니 번거롭다. 안 들으려, 안 보려 해도 듣게 되고 보게 되는 세상일들. 세상부적응아라도 된 것인가? 하하.
아,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지. 매우 큰일이다. 천주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많은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존경을 받던 분이기에 애도하는 물결이 크고 길게 이어지는 건 당연한 마당이다. 헌데, 언론의 행태는 도를 넘는 모습이다. 사실보다는 필요 이상의 허상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내고, 필요 이상으로 떠들어내는 모습 속에 도대체 얼마큼의 진정성이 깔려 있을까? 추모하는 마음 한편으로 씁쓸함이 내려앉는다. 하긴 용산참사에 대한 비판 여론을 오도하기 위해 살인자의 엽기 행각에 열을 올리기도 했었지. 하느님 말씀으로 세상을 밝힌다는 직분에 충실하셨을 추기경께선 대한민국의 민주화 여정에서도 막대한 역할을 해오셨다. 독재에 맞서는 사람들에게, 힘없는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고, 힘이 되어주셨다. 허나 어떤 때는 힘 있는 사람들, 권력 있는 사람들을 편든다는 비판도 받으셨다. 조선시대 주자학과 예론의 대가였고, 대표적인 북벌론자였던 우암 송시열은, 세속적인 명성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당파의 이익을 위해 주자학과 북벌론을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어떤 게 진실인지 정확하게 밝히는 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추기경님에 대한 찬양이나 비판이, 말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위장이 아니기를 바란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세속적인 희비애환에서 초연한 경지를 딛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맑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 종교지도자들의 커다란 몫이 아닐까. 요즘, 교회나 사찰에서 노골적으로 인간적인 집단 이기심을 부추기고 편승하는 일들, 겉과는 달리 속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면서 권력과 재력, 세태에 편승하는 일들이 자주 눈에 띄고, 귀에 들리기에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 들어도 못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하는 것이 더 많은 종교 지도자, 교회와 사찰, 나아가 큰 가르침에 대한 예의일까?
좋은 길 걸으면서 웬 쓸데없는 생각? 옥녀봉에서 면위산[부산]을 지나 맞춤한 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양달이라 눈은 없고, 가랑잎 쌓인 비탈길이 매우 미끄럽다. 조심조심 땀을 흘리면서 엊그제 길을 생각한다. 수안보에서 첩푸산에 갔다가 직마리재 - 고운리 - 상촌마을, 미사모 여섯이 걸었던 길. 그때 과메기 차가 붙여 준 이름, 허당. 뭔지 모르겠는데 많이들 웃었다. 빈집이라면, 비어 있다면? 마음을 비우는 것처럼 집을 비워 놓고 아무나 쉬어갈 수 있게 해준다면? 멋대로 새겨보니 허당이 좋아진다.
내려오니 낯익은 느티나무가 보인다. 아! 금잠. 충주 둘레를 걸을 때, 첫발과 마지막 발을 디뎠던 곳. 반가운 느티나무를 카메라에 담는다. 하곡을 지나 충주호리조트, 출발했던 곳까지는 아스팔트길이다. 어느 회사 연수원으로 바뀐 지동분교를 바라보며 정겨운 상상에도 빠져보고,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보물17호]도 보고, ‥‥‥. 오늘 길은 허당이 아닌데?
* 하천리 충주호리조트 뒤 - 옥녀봉 - 면위산[부산] - 금잠 - 국실 - 하천리 하곡마을 - 출발한 곳/4시간
/2009.02.2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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