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1. 20:36ㆍ충청
상탄지리에서 쇠사리재 너머 덕곡리. 오랜 가뭄 탓에, 물속에 잠겼던 집터와 시멘트로 만든, 작은 다리가 겉으로 드러난 풍경을 보면서 설레는 마음. 밤나무골에서 만난 어느 어르신께 여쭈니 서창리로 가는 길이 여기선 없단다. 물론, 옛 마을들은 모두 물속에 잠겼고, 깊은 물속을 바라보며 마을 이름을 지키고 있는 집이 두어 채씩 된다는 서창리와 황강리. 저기, 저쯤이니까 산길을 뚫어보자. 가파른 비탈을 타고 올라간 곳은 떡갈봉.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분명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어리석음을 이제 와서 아쉬워한다. 한참 동안 서서 방향을 확인하고, 헤치고 갈 길을 가늠한 다음, 골짜기도 타고 된비알도 몇 깨씩 타면서 땀을 흘린다. 휴~! 가볍게 한 걸음 하자고 한 건데 무리할 것 없이 일단 등곡산으로 올라가자. 등곡산에서 점심을 먹고 상탄지리, 출발했던 곳으로.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다. 자동차를 임도로 몬다. 쇠사리재 너머 덕곡 쪽이 아닌, 중치재 너머 황강 쪽으로. 참으로 험한 길. 이십 리가 넘게 돌고 돌아가니 넓고, 검푸른 물가 비탈에 밭이 있고, 비닐하우스가 있고, 집이 몇 채 있다. 황강이다. 서창은 좀 더 위쪽에. 번성했던 옛 터전은 저 물속에 잠든 지 오래된 두 마을!
옛 황강에는 장삿배가 닿았던 황강나루[황강진]가 있었고, 5일마다 한수장이 섰었고, 서원[황강서원]도 있었단다. 서창은, 충주댐 물에 잠기기 전에는 제천과 단양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교통요지였다. 옛날에 논양원(論陽院)이라는 원이 있어 '원리'라 했었고, 남한강 물길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어 '서창'이라고 했다.[청풍현 서쪽에 있는 창고] 꽤 오랜 동안 온갖 물자의 집산지로 번성했던 마을은 물속에 잠기고, 사람들은 충주로, 제천으로, 서울로 뿔뿔이 흩어졌다. 충주시 용산동에 있는, 꽤나 유명한 서창칼국수집 사장님도 물속에 고향을 묻고 나왔다고 했다.
수몰 직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느라 한창 어수선하던 즈음에, 저 물 속, 서창을 지나 덕곡마을에서 하룻저녁, 청풍으로 가서 또 하루 묵었던 일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지금은 저 물 속에 잠겨 있는 마을. 버스가 지나가고, 경운기 소리가 들리고, 개가 짖고, 길가 상점들에 사람들이 들랑거리던 풍경. 농기계를 고치는 사람, 목로술집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사람, ‥‥‥. 어수선하다기보다는 활기찬 모습으로 남아 있다. 히말라야 오지를 걸었을 때, 어쩌다 나타나던 마을 장터에서 받은 느낌도 그렇게 남아 있다. 삶을 꾸려가는 본연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래서 생기가 도는 기운.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나 일상에 분주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활력이다.
물속에 깊이 잠긴 마을.
황강, 서창, 덕곡, 밤나무골.
단 한 번 지나갔던 기억을 그리며,
그 때, 그 사람들, 그 거리, 그러하던 삶을 그리며,
헤매고 헤맨 끝에 물가에 선 나그네.
검푸른 물비늘.
묵직하게 출렁이는 너른 호수.
물이 차기 전에 딱 한 번 가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설레는데, 저곳에 뿌리박고 살다가 타지로 떠난 사람들 마음이야 ‥‥‥!
* 상탄지리 - 쇠사리재 - 덕곡 - 밤나무골 - 떡갈봉 - 산줄기와 골짜기 몇 개씩 - 등곡산 - 상탄지리 -(승용차) - 황강·서창 - 상탄지리 / 2009.03.01 / 최광옥, 이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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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창리에 있던 서창과 청풍에 있던 북창에는 세금으로 걷은 쌀을 보관했었고, 월악산 아래인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동창[충주 동쪽에 있는 창고]에는 군수품 보관했었다고 함.
* [서창리에 전하는 전설 하나]서창리 뒤에 있는 명산에는 명당자리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묘를 쓰면 그 사람 집안은 잘 될지 모르지만 마을은 변(變)을 당하여 망하고 만다는 예언이 있어 감히 묘를 쓰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한 삼백 년쯤 전에, 한 나그네가 이 마을에 있는 김무달이라는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과객이 보답으로 이 산의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란 말과 마을에 전해지는 예언을 두고 고민, 고민하던 김무달은 어두운 밤을 타서 조상의 묘를 몰래 옮겼다. 그러자 마을 샘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고, 밤에 노루 떼가 마을로 내려와 시끄럽게 울어대고, 마을에 불이 나고, 젊은 사람들이 앓다가 죽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나무 그늘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을 노인이 나타나, "이 산은 내 집인데, 어찌하여 내 집을 뺏겠다는 것이냐?" 하면서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서서 산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 암매장한 곳을 찾아내어 시신을 꺼내 불태우고, 뼈를 강물에 띄워 보낸 다음, 산신당사(山神堂祠)를 짓고 산신(山神)에게 정성껏 제를 올렸다. 그러자 마을의 샘물이 다시 맑아졌고, 온갖 재난도 사라졌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초에 산신당에 제를 올리며 마을의 지속적인 평온을 빌었다. 이 산신당은 새마을운동 때 헐려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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