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2. 20:28ㆍ경상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아니, 갑장산으로 간다.
어딜 간다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인가?
그저 훌쩍 떠나는 걸음이 이렇게도 즐거운 건가?
2009년 9월 12일.
뭐 엄청난 나들이도 아니고, 상주에 있는, 자그마한 산을 찾아가는 길.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가슴이 확 부풀어 오른다.
그러고 보니 한 달 가까이 일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주일에 벌초를 하느라고 산 그림자를 밟긴 했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떨어져 있던 동기간들이 모여 어울리는 오붓함과, 말없고 티 없는 자연의 숨결에 잠겨보는 편안함.
세상 안에 있는 즐거움과, 세상 밖의 즐거움.
남상주 나들목을 나오니 3번국도, 김천에서 상주로 걸어 올라오던 길이다.
야릇한 반가움이 일어나는데 곧바로 용흥사로 가는 좁은 길.
용흥사 앞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신발 끈을 매고, 사방을 둘러보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용흥사 앞에서 본 갑장산은, 두 팔을 벌려 늘어뜨리고 손끝을 모으는 모양을 하고 있다.
두 손바닥이 모아지는 곳쯤에 용흥사가 있고, 산꼭대기 바로 아래 갑장사가 있다.
오른팔 능선으로 올라가서 왼팔 능선으로.
가을을 실어 나르는 바람이 손님 접대를 제대로 한다.
간밤에 비가 내려 땅이 더 촉촉하고, 공기는 더 깨끗하다.
해님은 더욱 맑게 빛나고, 빽빽한 나무 그늘은 더욱 시원하다.
산길은 헉헉거릴 일도 없고, 지루할 일도 없게 아주 좋고 또 좋다.
갑장산 꼭대기.
동쪽은 낙동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동강이 모래사장과 어울려 구불구불 흐른다.
서쪽, 첩첩이 쌓이는 산봉우리들 뒤쪽에서 백두대간이 아스라이 뻗어간다.
갑장산은 상주의 안산이라던데, 상주, 함창 너른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의 서쪽은 주머니 모양의 골짜기가 흐르고, 동쪽은 낭떠러지에 깎아지른 듯 바위가 더러 박혀 있다.
아, 저쪽에 있는 바위가 나옹바위?
갑장사를 지었다는 나옹화상.
저기에 어디에 나옹선사의 그림자가 남아 있을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낭떠러지 바위벼랑, 산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오는데,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토리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짙은 눈썹에 머루 같은 눈망울을 가진 사람들.
문득, 저 아래, 함창에 있는 고령가야왕릉이 생각난다.
아득한 옛날, 가야 사람들도 저렇게 도토리를 주웠을까?
가야 사람들도 묵을 해먹었을까?
요새 사람들은 웰빙이니 자연식품이니 하면서 도토리묵을 찾는데, 그 땐 긴요한 식량이 아니었을까?
오늘 산에서 나의 주식은 삶은 감자 서너 개.
그리고 산속 외딴 식당에서 칼국수 한 그릇.
아침에 차창을 가볍게 두드리던 비가 돌아오는 차창도 두드린다.
요번엔 사납게, 마구 한바탕.
산에 있을 땐 쨍쨍했었는데.
* 갑장산[805.7]
- 상주시 지천동과 낙동면, 청리면 사이.
- 연악산[淵岳 -]이라고 하며, 상주의 안산[고려 충렬왕이 승장사에서 쉬면서 ,연악산을 바라보고 영남 제일의 명산이라고 한 후, 갑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함]
- 노음산[露岳], 천봉산[石岳]과 더불어 상주 삼악[三岳]
- 정상 바로 아래, 고려말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갑장사가 있고, 한참 아래에, 신라 문성와 때 처음 지었다는 용흥사가 있다.
- 갑장사[甲長寺]는, 승장사[勝長 - /갑장산/폐사], 남장사[南長 - /노음산], 북장사[北長 -]와 더불어 상주 사장사[四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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