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달림을 내려놓다[가지산-운문산]

2010. 2. 22. 10:07경상

봄은 나와서 맞는 것.

봄 기운은 살리는 힘.

 

1월 30일 이후 20여 일, 그 흔적을 입술에다 달고 지냈다.

아프리카 햇볕에 얼굴 허물이 벗겨지고 나서 입술에 남은 흔적.

무얼 먹을 때마다, 웃거나 입을 크게 벌릴 때마다 터져 피가 흘렀다.

이틀이면 낫겠지, 내일 모레면 낫겠지 하던 것은 속 편한 희망사항이었다.

귀국하여 뒤풀이 이후 개학, 졸업식, 종업식, 설, 송별회 등등 분주한 나날.

입술에 남은 그 작은 흔적이 온몸과 마음을 쥐고 흔들어 왔다.

움츠러지고, 약해지고, 게을러져 뒹굴다가 나선 걸음.

오늘, 2월 21일, 가지산을 넘고 운문산을 넘었다.

울산시와 밀양시의 경계가 되는 석남고개에서 출발하여 석골사를 지나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까지.

능동산, 재약산이 저기 보이고, 그 너머엔 신불산.

경남 밀양시, 경북 청도군, 울산광역시 울주군이 서로 나뉘는 지역.

산줄기가 이리저리 뻗어가고, 높은 산이 여기저기에 솟아 있는 곳.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을 실감한다.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이, 바람결이 봄을 속삭인다.

아, 그래, 봄은 이렇게 나와서 맞아야지.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나도록 그 놈의 입술에 매여 봄이 이렇게 다가온 걸 모르고 있었구나.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어제 아침, 그제 밤에도 잠깐 동안 눈발이 날리고 쌓였었다.

남쪽 지방이지만 높은 산 위에, 북쪽 비탈에 눈이 하얗다.

햇살이 퍼지면서 양지 쪽에 쌓인 눈에 질퍽하게 물이 배어난다.

비탈길, 눈 길, 미끄러운 여덟 시간, 그런대로 거뜬하다.

20여 일 동안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다.

아랫입술 한 가운데 점으로 남아 있는 것도 내일이나 모레면 없어지겠지.

 

계획 단계에서부터 조짐이 사나웠던 킬리만자로 등반.

내내 즐거웠지만 뜻밖의 고산증세에 시달렸고, 얼굴 허물 벗느라고 20여 일을 더 시달렸다.

오늘, 가지산 ― 운문산 산길을 걸으면서 그 시달림을 내려놓는다.

시달림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는 따져보지 않으리.

 

* 영남알프스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에 높이 1000m 이상 되는 7개의 산군(山群).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 재약산(천황산)[1,189m] 신불산[1,159m] 영축산(취서산)[1,081m] 고헌산[1,034m] 간월산[1,06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