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섬의 기적[단양]

2026. 5. 16. 21:18충청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비가 엄청나게 왔다. 산 너머 학교에 갔다가 점심 때쯤 해서 돌아오는 길, 사납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말 그대로 물 폭탄이었다. 우산을 편다는 건 이미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었다. 비 그치면 가라는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가는 꼬맹이에게, 사람들은 비닐을 내주었다. 책가방을 칭칭 동여맸지만, 무시무시한 빗줄기는 얼마 안 가 가방 속으로 파고든다. 산 고갯길은 도랑으로 변했고, 물은 발목을 넘어 장딴지까지 차올랐고, 발을 옮길 때마다 물이 튀어올라 얼굴을 때렸다. 뱀. 물위로 솟은 돌멩이들 위에 뱀이 한 마리씩 올라앉았다. 몸통의 색깔과 무늬가 각양각색이다. 이런 뱀도 있구나.신기하면서도 겁이 났다. 거의 모든 돌멩이 위에 뱀이 앉아 있는 것으로 기억될 정도로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길 아래 진짜 도랑 흙탕물 속에서는 돌 떠내려가는 소리가 쿠르릉, 쿠르릉, 한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어릴 적 한 장면이다. 그때, 우리 산골 마을에 한두 대뿐이었을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전국 곳곳의 물난리 소식을 쉬지 않고 전하고 있었다. 그 중에 시루섬 소식도 있었을 것이다.

단양 시루섬. 지금의 단성면과 단양읍 사이, 남한강에 있는 섬이다. 충주댐이 생기기 전엔 시루섬에 마을이 있었다. 증도리, 시루섬 마을이다. 기적이 일어났던 그때, 마을 주민은 44가구 250여 명이었다. 남한강 범람으로 마을이 점차 물에 잠기고 있었다. 주민들은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물을 피해 올라갔다. 날은 어두워지고, 물은 계속 차오른다. 마지막으로 주민들이 올라선 곳은, 높이 7m 지름 4m 되는 물탱크. 사다리 두 개를 엮어 잡아 주고, 밀어주고, 당겨 주면서 올라갔다. 주민들은, 콩나물시루보다도 더 빽빽한, 그 좁은 공간에서, 밤을 새웠다. 움직이지 마라. 간절한 외침이었다. 어떤 조그만 움직임에도 누군가 떨어져 변을 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이다. 새벽 1시쯤이라고 한다. 돌을 갓 지난 아기가, 콩나물시루보다도 더한, 무시무시한 압박을 못 이기고, 엄마 품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기 어머니는,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았다. 동요가 일면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다, 속으로만 슬픔을 삼켰다. 새벽이 왔고, 7m 높이 물탱크 6m까지 차올랐던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새벽 5시, 날이 밝으면서 구조대가 왔다. 14시간 사투는 끝이 났다. 주민들은, 그제야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1972년 8월 19일. 그렇다. 내가 장대비를 맞으면서 산 고개를 넘던 그 날이다. 그러다 말겠지. 충청도 사람들의 품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뭄이나 홍수 피해가 심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런 충청도에서 엄청난 물난리가 났고, 기적이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루섬의 기적, 시루섬 물탱크의 기적. 그렇다. 높이 7m 지름 4m 물탱크 위에서 250여 명이 14시간을 버텼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출렁다리 주차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시루섬의 기적 비문과 조형물이 있다.

2026년 5월 16일 토요일. 시루섬생태탐방교를 걷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면서 시루섬 위를 지나는 출렁다리이다. 길이 617m, 폭 1.8m. 시루섬에 들어가는 길은 없고,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지만,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과 섬 숲과 섬 가장자리 자갈 깔린 물가 풍경, 거기에 내려앉는 하늘을 볼 수가 있다. 주변 산과 물가 벼랑, 단양강 잔도와 만천하스카이워크, 단앙 읍내 하얀 건물 숲, 아래 위에서 강을 건너는 다리들, 오가는 자동차 행렬. 그림이다. 그림은 그림인데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수양개 선사 유물과 이끼터널, 골골, 물가, 여기저기에 깃들여 살아가는 마을들은 저 나름대로 세월을 이야기한다. 그중에 시루섬의 기적이 있다. 시루섬 물탱크의 기적이 있다.

- 시루섬 생태탐방교, 출렁다리는 오는 7월 개통 예정이며, 오늘, 5월 16일 토요일부터 다음달까지 주말마다 임시 개통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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