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도리사에서]

2008. 2. 27. 10:38경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것들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 헬렌 켈러


헬렌 켈러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산 빛과 하늘빛이 아름답다. 초가을로 접어드는 산은 묵직한 빛깔로 다가온다. 이십 일도 더된 듯한 비 끝에 벗어지는 하늘빛과 구름 빛이 한 없이 아름답고, 오랜만에 비치는 햇빛이 반갑다. 흙탕물을 가득 안고 흐르는 낙동강은 물비늘을 번들거리며 저 아래 벌판에서 유유하다.


2007년 9월 8일. 구미시 해평면 냉산 태조정(太祖亭)에서 능선을 따라 냉산(冷山) 마루(692 미터)로 가는 길. 단단하게 다져진 숲속 흙길이 오랜 빗속에 잘 축여져 있고, 나무들은 가을 맞을 채비에 골몰하는 표정들이다. 산마루엔 손바닥만한 흙바닥이 나무 그늘 속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나그네는 그 위에서 먼 풍경을 바라본다.


정상에서 가파른 내리막을 잠깐 내려오니 도리사다. 작지만 오래된 절.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백 년 쯤 전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 땅에 들어와 지었단다. 묵호자라고도 하는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 토굴[일선군:현 구미시 도개면]에 머물면서 포교하던 중, 냉산 눈 속에 복사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지은 절, 그래서 이름을 도리사(桃李寺)라고 했단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찾아와 경내를 거닐고 있다. 활짝 갠 날씨는 아니어서 좀 부옇기는 하나 먼 경치들이 좋다. 절에서 주차장까지, 구비가 심하고 매우 가파른 길을 내려오면서 힘찬 물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주차장 앞엔 산속 식당 두어 집에서 동동주, 파전, 두부김치, 토종닭 등 차림표를 내걸고 있다. 레포츠공원 입구, 차를 둔 곳까지 임도를 따라 걷는다. 돌고 도는 2.7 Km 임도는 역시 호젓하다. 도로 상태도 괜찮다. ‘그래, 이정도면 되겠다.’ 이 선생님께서 도리사를 소개하면서 말씀하신, 절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십 리가 좀 넘는 길의 정취가 그리워 임도를 되짚어 차를 몬다. 역시, 한번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도리사 ― 일주문 길을 포함하는, 길고 짧은 길 몇 개를 그려본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마주치는 산천의 모습에 늘 감탄한다.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사연들에도 감탄하고,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에도 감탄한다. 그럴 때마다 몸과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다. 일상에서 겪는 모든 일들을 모두 끌어안고, 모두 이해하고, 모두 배려할 수 있다는 생각에도 잠긴다. 그러나 막상 일상 속에 파묻히다 보면 그 때 그 마음, 그 때 그 생각에 못 미치는 때가 더 많다. 가슴으로 느끼는 게 작아서인가?


눈으로 느끼고, 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도 느끼는 것 같은데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무엇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레포츠공원앞 삼거리―태조산정―(능선)―냉산(태조산/692m) 정상―도리사―(임도)―레포츠공원 앞 삼거리

(2007.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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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도화상이 도리사 절집 앞에 있는 좌선대에 앉아 김천 황악산 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직지사(直指寺)라고 했음. 현재 도리사는 직지사의 말사임. 1976 도리사 세존사리탑 보수 공사 때 나온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고, 직지사 성보박물관 위탁 보관하고 있음.


* 냉산을 태조산이라고도 하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패한 후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숭신산성을 쌓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