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09:51ㆍ경상
청암사 둘러보고 수도산에 오르니
도선국사 수도암 천년(千年) 빛깔 그윽하다.
비단결 푸른 바다 이어지는 산등허리.
흰 구름 흩어지니 선경이 여기로다.
가야산 상왕봉은 불꽃으로 피어오른다던데.
저 멀리 석화성(石火星)을 구름이 싸고 있네.
수목은 길을 덮어 발걸음 괴롭히고,
하늘빛은 빈 산 가득 두 눈을 희롱한다.
온 나라를 짓밟는 장마 소식에 고민을 하다가, 예정한 대로 집을 나섰다. 2006년 7월 27일 늦은 세 시 삼십 분에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서 청암사로 걸음을 옮긴다. 청암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몇 차례 소실, 중창을 거쳤단다. 충남 가야산의 수덕사와 함께 비구니 수도 도량으로 이름이 난 사찰이다. 절을 죽 둘러보고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살피다가 손수레로 짐을 나르고 있는 스님께 길을 묻는다. 맥고자를 쓴 스님은 남녀유별을 생각하는 건지 속인(俗人)을 꺼리는 건지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주 자세하게 길을 설명하신다. 인간이 실아가면서 겪는 머뭇거림과 고민의 실체는 무엇일까?
청암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수도할 곳을 찾아 산을 헤매다가 명당임을 알고 이레 동안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는 곳이 수도산 기슭 해발 1080 미터 높이에 위치한 수도암이다. 전해지는 얘기를 들은 탓인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석탑과 석등에 끼어 있는 돌이끼가 오랜 향기를 전해 준다. 비로자나불 돌부처님은 억겁을 더듬는 듯 그윽한 눈길로 속인을 맞으신다. 좋다! 사방 멀리 펼쳐지는 산 빛과 허공 빛이 좋고,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석탑과 석등, 절집과 마당이 좋고, 거기에 노니는 바람 기운이 좋다.
수도암 밑 수도리 작은 폭포수 옆, 민박집 감나무 아래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다가 기운 찬 물소리를 들으며 한 밤을 뒤척인다. 28일 이른 여섯 시 삼십 분, 새벽 공기 깨끗한 수도암에서 가야산 쪽을 바라보고 걸음을 시작한다. 그저 좋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수도산(해발 1317 미터)에 올라 저 멀리 구름에 싸여 보일 듯 말 듯한 가야산 상왕봉을 바라본다. 안개 사이로 거창읍을 보고, 3번 국도를 걸으면서 눈길로 더듬었었던 곳곳을 어림잡아 본다. 그리고 걷는다.
봐 달라거나 나 예쁘다거나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피어 있는 꽃들을 본다. 산수국, 하늘말나리, 중나리. 흰여로, ‥‥‥. 이 정도는 알겠는데, 모르는 게 더 많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피어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표시 안 나는 격려와 응원이 되고 있다. 누가 알아 달라고 피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름을 모르는 채 지나가자니 미안한 생각도 든다. 부질없는 걱정이려니 하는데 유난히도 맑은 분홍색을 띠는 꽃들이 눈길을 끈다. 가지색 꽃잎을 달고 있는 솔나리를 보는 것도 처음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참나리, 중나리, 땅나리, 하늘말나리에 이어 새로이 알게 된 나리, 솔나리.
무모한 건지 오만인지 모르겠다. 유별난 장마로 온 나라가 난리라고 하는데, 알량한 짐작으로 기후를 예단하고 이렇게 산에 올라 능선을 걷고 있다. 떠나오기 전에 어른거리던 걱정들은 이제 없어졌다. 비옷도 가져왔지만 쓸 일이 없다. 적당히 개이고 바람도 시원하다. 대신, 길을 뒤덮고 있는 풀과 나무가 온 몸을 휘갈기며 채찍질을 한다. 이름 모를 넝쿨, 싸릿대, 조릿대 등등. 때로는 정글 속으로 터널을 뚫는 듯, 어느 땐 아무 생각 없이 온몸으로 돌진하듯 헤치며 간다. 가끔 저만치서 멧돼지가 킁킁댄다. 단지봉(1327)-좌일곡령(1258)-분계령-두리봉(1133)을 지나 헉헉거리다 보니 가야산 상왕봉(1430)이다.
가야산 마루에는 바위 봉우리가 둘인데, 하나는 경상북도 성주군에, 하나는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한다. 그래서 봉우리 이름을 적은 표지석이 둘이다. 합천군 쪽은 ‘가야산 우두봉’(1430 미터), 성주군 쪽은 ‘칠불봉’(1433 미터)이다. ‘해인사에서 온 듯한 젊은 스님들 너덧이 합천군 쪽 봉우리에서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숨 돌리고 나서 스님들 손에 사진기를 맡긴다. 함께 고생한 최광옥 선생님과 나란히. 이제 몸은 지칠 만큼 지쳤다. 앉아 쉬면서 맥주 깡통을 딴다. “쨘! 고생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가야산에 있는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대가야의 시조 뇌질주일이고 또 하나는 금관국의 시조 뇌질청예[수로왕]라고 한다. 대가야 터는 고령에 있고, 금관가야 터는 김해에 있다. 지난 봄, 상주에서 문경 길을 걸을 때, 함창에서 고령가야 어느 왕비의 능을 저 만큼에서 보았다. 낙동강 물줄기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았던 가야 여러 나라, 그 중 가야산 주변을 지키던 여신이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얘기다.
아득한 얘기에 무상함을 느끼다가 해인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가는 비가 내린다. 고마운 마음으로 맞는다. ‘감사합니다.’ 장마 예보를 무릅쓰고 나선 무모한 발길을 헤아려 참아주시다가 막바지 더운 몸을 식히라고 가볍게 뿌려 주시는 비님께 감사하고, 그렇게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이런 길을 허용해 준 식구들에게 감사한다. 해인사 앞 민박집에서 골짜기 물소리를 들으며 눕는다.
“세차게 불던 바람에 드높던 파도가 어느새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수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해인삼매(海印三昧)는 부처가 이룩한 깨달음의 내용, 일체의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근원이며 본래의 모습이다.”
(200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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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15:30)-청암사-수도암-수도리(18:30)
<7월 28일> 수도암(06:35)-수도산 정상-단지봉(1326.7)-좌일곡령(1257.6)-1124.9봉-(점심)-분계령-두리봉(1133.4)-부박령-가야산 상왕봉(1430)-해인사(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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