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맥이 늦은목이 도래기재

2008. 2. 27. 08:50경상

“저기다!”

“저기!”

“저어기!”


 헉헉거리며 올라선 능선에서 오줌을 냅다 갈긴다. 헉헉거리면서 흘린 땀방울은 한강 물에 보태질 것이요, 휴~! 하면서 내갈긴 오줌 줄기는 낙동강 물에 합류할 것이다. 오랜만에 백두대간을 걸어보자고 올라왔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국토의 남북으로 꿈틀대며 뻗쳐 있는 백두대간. 단 한 번도, 아무리 작은 물이라도 건너는 일 없이 이어진다는 산줄기. 장백정간과 열세 개 정맥들과 함께 이 땅의 물줄기와 기후와 식생, 말씨와 풍속을 가르고 있는 산줄기. 말로써 다 풀어낼 수 없는 대자연의 신비 속에 몸을 던져 본다.


7월 25일, 한낮에 충주에서 버스를 탔다. 단양에서 점심을 먹고, 어의곡까지 택시를 탔다. 늦은맥이로 오르는 길은 새밭 마을 왼쪽 계곡으로 나 있다. 푸른 숲 맑은 바람, 시원한 물소리가 쨍쨍한 햇빛에 번쩍인다. 심산유곡 벽계 옥류수라. 훌훌 벗는다.


“풍덩~!”


내 몸이 물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다. 내가 물이 된 것이다. 물에도, 내 뱃속에도, 머릿속에도 티끌 하나 없다. 그러면 물과 내가 둘이 아니고, 산과 내가 둘이 아니다. 자연과 하나 되는 이 경지를 남이 상상한다는 게 가능할까? 신선이 따로 있는 걸까?


늦은맥이에 올라, 비닐을 깔고 이슬가리개를 치고 침낭을 편다. 그냥 자기 아쉬워 모닥불 옆에서 소주 한 잔씩을 나누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아 ~ !”

‥‥‥.


사람은 한 낮 땡볕 아래 땀을 비 오듯 흘렸는데, 산은 세상 고요한 새벽녘에 땀을 흘린 건가? 온 숲이 안개 속에서 이슬을 가득 머금고 있는 새벽에 요기를 하고 짐을 꾸린다.


고치령에서 샘을 찾아 점심을 먹고 마구령으로 향한다. 미내치 가까운 산줄기에서 멧돼지 새끼들을 만났다. 내 기척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새끼들 몸에 나 있는 예쁜 가로줄 무늬가 머릿속에 생생하여 기분이 좋다.


마구령에서 갈곶산으로 오를 때부터 발걸음은 지칠 만큼 지쳐 늦은목이에 왔을 때는 반 녹초가 되었다. 저문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눕는다. 자정 무렵, 떨어지는 빗속에서 배갈에 육포를 뜯으며 퇴로를 궁리한다.


1안 ― 생달 길을 더듬어 민가를 찾아 대피

2안 ― 선달산 넘어 도리기재에서 어떻게.

3안 ― 모든 것 무릅쓰고 일정 강행.


“일단 응급조치하고, 내일 아침 상황을 보자.”


결국 이튿날, ‘도래기재’에서 멈추고, 춘양-봉화-영주-점촌-충주로 차를 갈아탄다.


늦은맥이-마당치-고치령-미내치-마구령-갈곶산-늦은목이 (26일)

늦은목이-선달산-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 (27일)


대간 줄기에 있는 이름들뿐만이 아니다. 내가 사는 마을과 산, 네가 사는 들과 골짜기, 곳곳에 붙은, 우리가 부르는 이름들을 헤아려 본다.


― 우리 마을을 어떻게 부를까, 저 뒷산 이름은, 그리고 저 물과 저 봉우리, 저 골짜기, 저 바위는?

― 아, 저건 장군의 위엄이네. 저건 선녀가 단장을 하느라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형상이고. 노루 모가지 모양이니 노루목. 여기는 참나무가 많으니 참나무골. 여기가 옛날 장터래.

‥‥‥.


― 이건 이렇게 하면 어떨까?

― 나는 이런데.

― 그래, 좋다.

― 아니야, 이래야 돼.

― 그럼 이렇게 하자.

― 좋다.

― 나 좀 서운했어.

― 그래?

― 좋아.

‥‥‥. 


땅의 이름은 물론 세상살이의 모든 원칙이라는 건 이렇게, 수많은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드는 게 아닐까? 그래서 민주주의가 아닌가? 그 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세상살이 바탕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가? 진리는 단순함에 있다. 그게 제도로 정착되어 운용되면서, 사리사욕이 개입하여, 단순함이 어질러질 때 갈등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그게 인간 세상의 숙명인 것인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바르게 이끌어가는 데 있어, 뚜렷한 선지자나 선각자, 활동가의 역할은 정말로 큰 것이다. 그러나 그 바탕은, 유구한 세월, 수없는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과 의지와 정, 사심 없는 표현과 이해, 수용과 비판과 협력‥‥‥. 이런 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룩되는 것이 아닌가? 히말라야 자락 골골에서 이어진, 이름 모를 사람들의 숱한 삶 속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정리됐듯이. 동서양 곳곳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일상의 삶을 바탕으로 무슨 가르침, 무슨 철학들이 정리됐듯이.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해지는 바람결에 신데렐라가 생겨나고, 춘향이가, 심청이가 태어났듯이.


그래서 생각한다. 내 이름 없음에 연연하지 말자. 내 재주 없음을 한탄하지 말자. 당당하게 평범하자. 좋은 이웃이 되자. 이웃을 존중하자. 이웃에게 잘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이웃을 돕자. 이웃과 함께 하자.

(2005.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