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령을 넘으며

2008. 2. 27. 08:47경상

 2005년 6월 26일, 새벽 여섯 시에 의풍리 담뱃가게집, 콘테이너 민박집을 나서니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어루만진다. ‘소백산국립공원’이란 안내판 밑에 있는, ‘무장공비 침투로’라고 쓴, 또 하나의 안내판을 보고 허허 웃으면서 고치령 고갯길을 시작한다.


마락리를 벗어나니 호젓한 숲속길이 이어진다. 고칫재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길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그윽한 세계로 빠져든다. 이따금 나타나는, 무너지고 기울고 한 폐가옥 앞마당에선 무성한 잡초들이 여름 햇볕 아래서 옛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고치령, 아니 고칫재.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이어주는 고갯길. 자연의 품에 안겨 세속에 찌든 때를 씻어 내는 행복 외에 무슨 생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런데도 자꾸만 인간사에 대한 상념을 떨쳐내지 못하겠다. 정란(靖亂)의 피바람 속에 정의와 도리를 지키려던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노산군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 위리안치됐고, 임금이 된 수양대군은 동생인 금성대군은 순흥 땅에 유배시켰다. 청령포와 순흥땅, 그 사이를 왕래하던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좌석리 세거리에서 고칫재를 넘어 의풍을 지나 와석리 노루목으로 해서 영월 청령포로 이어지는 이 길을 걸어 다녔다는 밀사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노루목에 그 무덤이 있는 난고 김병연의 생애는 또 어떠했는가? 역적의 자손이며,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죽을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방랑 시인 김 삿갓. 어제 저녁 나절엔 버들재에서 김삿갓 묘역을 앞에 두고 두부 안주에 더덕 동동주를 마셨다. 유기농 민박 주인 신춘선 씨로부터 무덤의 사연과 태백, 소백 양백지간의 풍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박집을 지은 이야기 등 환담을 나누면서.


죽음을 무릅쓴 과감함. 풍자와 해학, 기행으로 일관한 초탈함. 방식만 다를 뿐, 세상을 향한 인간의 투쟁 모습들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투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장공비 침투로라고 쓴 표지판도 이면에 그런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투쟁의 역사이고, 투쟁을 통해 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 그래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하는 건 좀 과격한 말일까?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 제도라는 굴레, 관습이라는 굴레, 아집이라는 굴레, 집착이라는 굴레.


그러나 이런 골치 아픈 생각도 한 바탕 너털웃음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러면서 가는 걸음을 받아주는 숲과 하늘과 공기가 있어서 좋다.


깊숙한 천연림 속 은밀하게 숨어 있는 연화폭포. 그 시원한 물에 온 몸을 풍덩 담그는 것으로 이번 걸음을 마무리한다.

(2005년 6월)

 

 

* 영춘-밤재-베틀재(또는 배터재)-의풍 : ‘비포장 버스 노선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둘째 고개는 ‘선녀가 베를 짜는 형세’로 ‘베틀재’라는 설(담배가게 민박집 할머니)과 이곳이 바다였을 당시 배가 넘어 다녔던 곳으로 ‘배를 대는 터’ 즉, 나루터였던 고로 ‘배터재’가 맞다는 설이 있음.


* 의풍 : 연춘, 영월, 부석, 단산 어느 쪽에서건 험한 고개를 넘어야만 갈 수 있는 오지 중 오지. 『정감록』이나 『격암유록』 등 예언서에서 ‘재난의 화를 입지 않는 승지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꼽는다고. 영춘초등학교 의풍 분교에 4명 재학 중. 담배 가게 민박집 할머니 얘기로는 예전에 부석 장날이면 장꾼들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 샘터 : 고치령 정상 약간 밑에 있어 백두대간 줄기에서 솟아나는 샘.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함. 물맛이 꿀맛.


* 산신각 : 고치령 정상에 있음. 단종은 죽어 태백산 신령이 되었고, 금성대군은 죽어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고.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고치령에 있는 이 산신각에선 단종과 금성대군을 함께 모신다고 함. 참고로 태백산엔 ‘단종각’이 있음. 마침 세 명의 중년 남녀가 밤새 치성(기도)을 드리고 자리를 뜨고 있다.


* 연화동 : 의풍에서 고칫재에를 넘어 좌석리 가까이에서 오른 쭉 2Km 정도 거리에 있다. 연화부수(蓮花浮水)-연꽃이 물 위에 뜬 형상의 명당이 있다고 함. 연화동천(蓮花洞天)이라 크게 쓴 입석이 있고 민박집 하나 펜션 하나에 과수원 등 농지가 있음. 동쪽과 서쪽 골짜기 깊숙한 곳에 각각 ‘연화(동)폭포’, ‘연화(서)폭포’가 있음.


* 노루목 : 와석1리 김삿갓 묘역에서 의풍으로 이어지는 길목. 개울물에 머리를 대고 있는 노루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고갯길이 있다. 지금은 그 고개를 깎아 길을 넓혀 놓았으니 목줄을 따 결국 노루를 죽인 꼴이 되었는데, 유랑께서 길바닥에 더덕동동주를 뿌려 끊어진 목을 이어주는 수술(?)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