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11:52ㆍ동서남북
먼 산 응달에는 희끗희끗 흰 눈이 남아 있고, 찬 공기에 몸을 움츠리기는 하지만, 볼을 스치는 바람결엔 분명 봄의 입김이 서려 있다. 2월 17일 아침 아홉시 삼십 분. 의정부시 장암역 앞. 3번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유랑최랑이랑신랑.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에서 출발하여 서울 송파에서 밤잠을 자고, 의정부 장암역까지 걸었던 것이 작년 2월 20일과 21일이었으니 꼭 1 년만이다. 2006년 1월 31일 경상남도 미조항에서 첫발을 뗀 지 꼭 2 년만이다.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3번국도 남한 지역 끝까지 걸어갈 것이다.
수도권, 도로마다 자동차 행렬이 넘쳐난다. 의정부 시내로 들어서면서 중랑천을 따라 걷는다. 둔치에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냇물엔 가끔 얼음이 보이고 청둥오리를 비롯한 겨울 철새들이 떼를 지어 물위에 떠 있다가 날곤 한다. 낚싯대를 펴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봐서 물고기가 꽤 있는 모양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생각보다 물이 맑고 큼직한 고기가 노는 것도 보인다.
시내 입구 둑방 가에 꽤 높게 솟아 있는 굴뚝은 쓰레기소각로 굴뚝이란다. 철망 울타리가 길게 이어지고, 정화된 물이 제방 밑 관을 통하여 냇물로 흘러들어오는 걸로 봐서 의정부시 종합 쓰레기처리장인 것 같다. 한참을 걷다보니, 말을 할 때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날씨가 추워 얼굴이 언 것이다. 냇가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선다.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녹양역 건물로 들어가 따끈한 어묵국물로 몸을 녹이며 좀 쉬었다 간다.
의정부시가를 벗어나자마자 양주시다.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고 또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최랑이 전화를 받는다. 시베리아에도 같이 갔었고, 지난 12월에 충주에서 목도까지 함께 걸었던, 서울에 사는 윤명용 님. 아침 볼일을 마쳤고, 오후 걸음을 같이 하겠단다. 양주에서 동두천 쪽으로 흐르는 차탄천 둔치 역시 산책길, 자전거길이 잘 닦여 있다. 간단한 운동기구들도 보인다. 양주시를 벗어나 동두천시로 들어서면서 최랑의 친구를 만난다.
소요산역 앞을 막 지나 얼마 안 되는 곳. 길가 건물 앞 천막에서 사람들이 고기를 굽는다. 동두천역 다음에 있는 소요산역은 서울 지하철 1호선 북쪽 종점이다. 안주 무료 소주 한 병 3,000원. 축산농가에서 홍보 목적으로 차려 놓은 것 같다. 커다란 난로 두 개에 큼직한 구이 판을 얹어 놓았다. 다리도 쉴 겸 소주를 두 병 산다. 소의 지라와 내장, 돼지 껍데기. 특히, 지라의 맛이 그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
의정부에서 양주, 동두천을 거쳐 오면서 처음으로 고개 맛이 나는, 그러나 높지 않은 고개를 넘는다. 그간 두어 군데 있었던 것 같은데 고개라는 느낌은 없을 정도였다. 동두천시 하봉암동에서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갯마루 묵밭에다 강아지처럼 흔적을 남기고 저 아래 불빛이 보이는 한탄강 유원지를 향하여 걷는다.
전곡 입구 한탄강. 38선과 6ㆍ25 관련 내용을 적어놓은 커다란 돌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리를 건넌다. 저녁 여섯 시가 훌쩍 넘었다. 보름 가까운 달빛을 받으며 먹을 자리, 잠잘 자리를 찾는다. 생선회에 소주와 매운탕, 그리고 주고받는 이야기와 웃음소리. 맛있고, 멋있는 저녁을 먹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윤명용 님께서 극구 밥값을 치르신다. 시간을 내어 와 준 것만도 반가운 일이고, 돌아갈 길도 바쁜 이에게, 그게 아닌데‥‥‥. "고맙습니다.”
따끈따끈한 온돌방에서 참으로 잘 잤다. 밝은 날 일어나 보니 바로 전곡읍내 초입이다.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또 걷는다. 18일 아침 이른 여덟 시.
의정부 ― 양주 ― 동두천 ― 전곡 ― 연천. 이틀째 걷는 길이 거의 평지다. 경원선 철도가 3번국도와 나란히 간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추가령구조대[추가령구조곡]를 걷고 있는 것이다. 도로와 경원선 철로와 강이 나란히 이어지고 양옆으로 벌판이 넓고, 땅이 살져 보인다. 너른 벌판에 겨울철새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고, 논바닥에 앉아 먹이를 주워 먹는다. 끼욱끼욱 우는 소리가 많이 들리지만, 소리를 내는 새는 무리 중 몇이다. 무슨 구령을 내리는 것도 같고, 신호를 주고받는 것도 같다. ∧ 자 대열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도 보인다. 이따금 지나가는 열차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잠깐씩은 철길도 걷고, 빈 논도 걷고, 둑방길도 걷는다. 꽁꽁 얼어붙은 강 얼음도 밟아 본다. 한두 번은 물 위로 드러난 돌을 밟고 작은 내도 건넌다.
* 추가령 : 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평강군[현 세포군] 사이에 있는, 해발 586 미터 되는 고개
* 추가령구조곡 : 추가령을 중심으로, 원산 양흥만[동쪽]에서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호(弧)를 그리며 이어지는 좁고 긴 골짜기[추가령구조대]. 단층이나 습곡 따위의 지각운동으로 생긴 골짜기를 구조곡이라고 함.
연천군 신서면 소재지인 대광리에서 점심을 먹는다. 울면 셋 짬뽕 하나. 신탄리역 앞에서 잠깐 쉬었다가 좀 걸으니 강원도 철원 땅이다. 개울 건너 저쪽에 끊어진 철교가 보인다. 옛 경원선이다. 경원선엔 지금 연천군 신서면 대광2리에 있는 신탄리역까지만 열차가 다닌다.
철원읍 대마리. 길지 않은 오르막길을 올라서니 다시 평지가 이어지지만 낮은 산들이 가까워진다. 백마고지위령탑이 보이고, 3번국도는 87번국도와 만난다. 그 이상 북쪽으로 가는 길을 군인들이 막고 있다. 민간인 통제구역이 가까운 것이다. 오후 4시 10분. 여기서 이들에게 사정을 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들 서성인다. 사방을 둘러보고, 하늘을 본다. 더 저물기 전에 먹고 잘 곳을 찾자. 전화로 택시를 불러 갈말읍[신철원]으로 간다.
우수 무렵 철원 땅에 봄기운이 돈다.
하늘에 기러기 떼 북으로 간다는데
남해에서 온 나그네는 걸음을 멈추네.
먼 산에 눈이 녹아 노래하며 흐르고
싱싱하고 힘찬 기운 온누리에 넘치면
가로막힌 저 쪽에도 꽃 피고 새 울지어다.
저기에도 길이 있고, 들과 산이 있건만
하늘빛과 물소리 다르지 않건만
녹슨 철조망 몇 가닥이 무엇이던가.
봄볕이 무르익고 푸른 숲 우거지고
시나브로 가시철망 빛바래지는 어느 날
멈추었던 발걸음 북으로 이어가리.
바로 내일이 우수(雨水).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새싹이 돋기 시작한다고 했다. 기러기가 북으로 날아가고, 대동강 물이 풀린다고 한 우수 절기에 철원에 왔다. 재작년 1월말, 경상남도 남해 미조항에서 때 이른 봄비를 맞으며 시작한 걸음이다. 압록강 가에 있는 초산까지 가자고 했다. 띄엄띄엄, 틈틈이 걸어왔다.
2월 19일. 아침을 먹고, 도피안사와 직탕폭포, 고석정을 둘러보았다. 동송읍까지는 버스, 도피안사를 거쳐 직탕폭포까지 택시를 탔다. 도피안사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고, 국보63호인 철조비로사나불이 있다. 직탕폭포는 겨울철 얼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명성에 못 미치는 듯했다. 직탕폭포에서 고석정까지는 걸었다. 고석정 바위와 협곡과 물은 다음에 꼭 다시 와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철원평야. 벌판이 참으로 넓다. 해발 947 미터인 금학산이 우뚝 솟아 흰눈을 검은 나뭇가지와 섞어서 안고 있을 뿐, 다른 산들은 나지막하다. 여러 종류의 겨울 철새들이 너른 들판에 앉았다 날고, 날다가 앉는다. 의정부, 양주, 동두천, 연천을 거쳐 오면서 줄곧 보아 왔지만 여기, 철원평야엔 더욱 많은 철새들이 날고 있다. 종류도 더 많고, 끼욱끼욱 우는 소리도 더 가깝고 힘차게 들린다.
이제 봄이 오면 저 새들은 북으로 날아가겠지. 어느 봄엔가 나도 북으로 가볼 것이다. 걸어서 갈 것이다. 지금 못 가는 것을 서러워하지 말자. 지금은 한탄할 때가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기다리자. 그리고 찾자. 갈 수 있는 길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우리는 갈 것이다. 압록강 가 초산진까지. 아! 압록강.
유선생님!
최선생님!
신선생님!
임선생님 !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간 3번국도 도보여행에 관심 가져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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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06:00 충주터미널 - 고속버스-동서울-전철-의정부 장암역 - 녹양동 - 양주시 유양동 - 덕계동 -희정동 - 동두천시 송내동 - 보산동 -동두천동 - 상봉암동 - 하봉암동 -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 18:00 전곡읍
2월 18일
08:00 전곡읍 - 연천읍 와초리 - 차탄리 - 연천역 - 신서면 대광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 14:00 - 대마리 통제소(3번국도와 87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 - 택시 - 갈말읍(신철원)
2월 19일
갈말읍 - 버스 - 동송읍 - 택시 - 도피안사 - 택시 - 직탕폭포 - 도보 - 고석정 - 승용차 얻어 타고 - 갈말읍 - 11::00 버스 - 동서울 - 점심 먹고 - 13:40 고속버스 -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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