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도 많고 전설도 많아[음양지-하곡-금잠]

2008. 2. 27. 13:01충주O

12월 3일 일요일. 겨울 날씨답게 쌀쌀하지만,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니 걷기에 딱 맞는 기온이다. 이른 아홉 시 이십 분. 동량면 손동리 음양지 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한다. 유랑, 최랑, 임랑, 이랑. 음양지 마을은 천등산과 인등산 사이에서 두 산의 정기를 받고 있으며, 개울을 경계로 북쪽이 양짓말이고, 남쪽이 음짓말이란다.


마을회관 앞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꼬불꼬불한 도로를 지나니 충주호 넓은 수면이 펼쳐진다. 아까보다 더 큰 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한국코타 레저타운이고, 몇 발짝 더 가니 하천리 하곡 마을이다. ‘옥녀봉―부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양지 바른 기슭에 마을이 안겨있다. 지난 번, 미라실에서 음양지로 걸어오는 내내 이 산을 바라보면서 걸었었다. 보통 두 봉우리를 구분하지 않고, ‘옥녀봉’ 또는 ‘부산’이라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둘 중 더 높고 큰 봉우리가 ‘부산’(해발 740 m)이고, 그 서쪽 700여 미터 되는 지점에 있는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이 산 아래 재앙과 환난을 면할 수 있는 길지가 있다고 전해지며, ‘부산’의 이름도 본래 ‘면위산(免危山)’[위태로움을 면할 수 있는 산]이었단다. 그런데 일제가 지명 정리를 할 때, ‘면위산’이란 말을 ‘며느리산’으로 잘못 알아듣고, ‘며느리 부(婦)’ ― ‘부산(婦山)’으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충주시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도 ‘부산(婦山)’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잡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뻔한 일이라도 한 번 정해지고 나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은 인류사회의 보편적 생리인가, 아니면 우리에게만 있는 병폐인가? 그러려니 흘려보내는 것인가?


옥녀봉에 얽힌 전설을 들어보자.

― 신라 말, 법경대사가 열일곱 살 나이에 머리를 깎고 입산하여 수행을 하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어느 날 밤, 한 처녀가 찾아온다. 좁은 방안, 마주보이는 곳에서 요염한 처녀가 옷을 갈아입는 가운데 수행승은 눈을 감고 불경을 왼다. 처녀의 이름은 ‘옥녀’이고, 왕도에 있는 고관대작의 귀한 딸이란다. 이웃 도령과 사랑에 빠졌으나 혼인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방랑의 길을 나선 것이다. 전국 명승지를 돌아다니면서 독신으로 살아갈 작정을 하지만, 외롭고 허전하여 견디기가 어렵다. 준수한 용모에 반한 처녀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수행승은 미동도 없다. 그렇게 3 일이 지나자 처녀는 눈물을 흘리며 개천에 빠져죽겠다고 나간다. 저승에 가서 인연 맺자는 짤막한 한 마디뿐 수행승은 불경을 계속 외는데, 산모퉁이 계곡을 막 지나는 처녀가 관음보살로 보이면서 배광이 발한다. 그 후 암자에는 옥녀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가 가끔  찾아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 이런 얘기도 있다.

이 산 밑에서 토정 이지함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어느 환한 달밤에 파초선을 든 선녀가 계곡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쫓아갔다. 선녀는 하늘에서 약수를 뜨러 왔다고 하면서, 상탕은 천제의 것이니 하탕과 중탕의 물만 먹으라고 하였다. 그 후 선녀의 이름을 따서 ‘옥녀봉’이라 했다.


손동리, 하천리, 지동리에 걸쳐서, 제천천 안쪽에 있는 마을들을 ‘개천안’[개천의 안쪽]이라고 한다. 개천안은 예로부터 길지로 알려져 왔고, 풍수지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토정 이지함은 개천산 주변의 ‘만지’, ‘독지’, ‘무동’ 세 군데를 살기 좋고 인심 좋은 곳 ― ‘대길삼지(大吉三地)’라고 했단다. 정토사 절터는 충주댐 물속에 잠겨 있지만, 법경대사자등탑비가 위로 옮겨져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지함이 연화부수형 명당이라고 한 ‘황참의 묘’도 수몰되기 전에 위로 이전되었단다. 여기저기 문인석과 비석으로 치장한 묘가 보인다. 명당이 많고, 길한 땅의 정기를 타고난 인물들이 많았다는 얘기인가? 이따금, 조그맣고 빨간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감나무들이 찬 공기 속에서 겨울 햇볕을 쬐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명당도 많고 설화도 많다. 숱한 세월, 숱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이야기 속에는 숱한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이 녹아 있다. 부귀하거나 궁핍하거나 간에 나름대로 겪어가는 인간적 고뇌가 있고, 그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이 있다. 눈물 끝에 힘을 얻고, 웃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땐 체념으로 마음을 넓히고, 한 차원 높아진 정신세계를 가꾸어 간다. 진솔한 본능은 가끔씩 폭발해 제도와 관습의 틀을 넓히기도 한다. 뒷사람들도 옛날이야기에 눈물과 웃음을 섞는다. 세월이 바뀌고,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사람’이라는 본질.


금잠에서 금잠까지. 충주시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작년 이맘 때, 금잠에서 삼탄까지 ‘열린 도보여행’을 한 후, 그 길을 이어서 걸은 것이다. 가볍게, 바람 좀 쐬는 기분으로 걷자고 그려 놨던 길. 오늘, 두 시간짜리까지 합쳐서 열 차례로 나누어 걸었다. 아름다운 산천의 모습에 취했고, 땀 흘린 뒤 찾아오는 개운한 맛에 흐뭇해하곤 했다. 혼자서도 걸었고, 둘이서도 걸었고, 넷이서도 걸었다. 첫날 금잠에서 삼탄까지는 아홉이서 여덟 시간 동안 느긋느긋 걸었었다. 충주,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서 크게 낯선 것은 없었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고, 나그네를 대하는 순박한 마음들을 보았다. 곳곳에 서려 있는 옛이야기도 들었다. 옛이야기 속에서나 걷는 길가에서나 사람들의 애환은 끝없이 엮어지고 있다. 휘적휘적 나그네 발길도 계속하여 이어진다. 금잠 느티나무 아래에 다시 와서 한잔 털어 넘긴다. “캬~!”

(2006.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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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경대사자등탑비 설화 ― 법경대사 자등탑비는 고려 태조 때, 법경대사의 제자 홍림대덕이 왕실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고 한다. 비석 돌은 법경대사가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고 경기도 석산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바윗돌을 운반할 때, 육로로는 불가능해서 수로를 이용하려는데, 바위를 싣기만 하면 배가 부서지거나 가라앉는다. 이에 법경대사가 장정 두 사람과 밧줄을 준비시킨 뒤 하늘을 향해 합장을 하고 주문을 외기 시작한다. 하루가 지난 뒤, 바위에 밧줄을 매게 하고 다시 주문을 외니 바위가 물에 떠오르고, 강바닥은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빙판 위로 바위를 옮기고 난 후 강 얼음은 다시 녹았단다. 또, 비신 위에 이수를 얹는 일로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할머니 손에 끌려가던 동자가, “언덕 흙을 파서 비석 주변을 메우고 이수를 끌어 올린 후, 흙을 치우면 쉽지 않겠는가?” 하는데 과연 옳은 말이라. 홍림대덕이 그리 하도록 일을 시켜 놓고 동자를 찾으니 간곳이 없다. 대덕이 길가에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자 개천산 봉우리에 오색 무지개가 뻗치며 관음보살이 서천을 향해 구름을 타고 가더란다.


* 황참의 묘 ― 어느 날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지함을 아내와 아들, 딸 셋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이 ‘묘자리’ 얘기를 꺼내자 토정은, “외인이 있어서 ‥‥‥.” 하더란다. 이웃 황씨 집안에 출가한 딸은 뾰로통한 채 밖으로 나갔으나 호기심을 못 이겨 방안 이야기를 엿들었다. “뒷밭 돌서렁에 ‥‥‥” 그런데 이튿날 이지함이 쾌차한 반면 사돈 황참의가 돌연히 죽었다. 황참의는 며느리가 엿들은 자리에 묻혔고, 자손들은 줄줄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됐다. 유복하게 사는 자손들이 조상의 묘에 석물 치장을 하는 건 당연한 일. 헌데 그 명당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돌로 연꽃을 눌러 놓으니 연꽃이 연못에 가라앉을 밖에. 그리하여 여덟 판서까지 나온 집안에서 장정이 무려 스물다섯 명이나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황참의 묘는 충주호 수몰 전 위로 옮겨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