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건 다리와 발[충원교-미라실-음양지]

2008. 2. 27. 13:00충주O

11월 19일 일요일 아침, 충주시청 옆.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세 사나이가 만났다. 유랑, 최랑 이랑. 오히려 안개가 벗어진, 충주댐 아래 충원교에서 발걸음을 시작한다. 선착장을 지나고 꽃바위[화암리]를 거쳐 서운리로 간다. 구불구불 물을 안고 도는 길에 가끔 공사 차량이 소음을 일으키며 괜한 위협을 한다. 꽃바위[화암리] 마을에 빨간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산수유나무가 많이 보인다. 마그실농장 가는 길이 갈라진다.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선비들이 막을 치고 묵었대서 ‘막의실[麻衣-]’이라고 했던 것이 ‘마그실’이란 마을 이름이 됐다고 한다. 마을 대부분은 충주댐 물속에 잠기고 이름만 남은 셈이다. 물 건너 저쪽이 종민동, 저것은 계명산, 저건 종뎅이산, 저기가 남벌이다. 서운리에서 수리재를 넘으면 미라실이다.


“여기 길이 있네요.”

“가 볼까?”


수리재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다가, 아까부터 마음을 끌던 바위 봉우리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산길로 들어선다. 능선에 서니 양 옆으로 충주호가 보인다. 월악산이 저만큼 가깝다, 저쪽 금수산 뒤로 소백산이 보이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물은 이 골짝 저 골짝까지 파고들며 바다를 이룬다. 장관이다. “야~!” 한참 동안 넋을 놓는다. “여기가 좋다.” 뱃속에 점을 찍고 수리재로 향한다.


“저 봉우리도 넘어야 하나?”

“올라갈 수 있을까?”

“가 봅시다.”


수리봉. “수리재 옆에 있는 봉우리이니 ‘수리봉’이라고 하자.” 전부터 붙어 있는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셋이서, ‘수리봉’이라고 이름 짓는다. 수리봉에서 수리재를 지나는 능선은 주봉산으로 이어진다. 옛사람들이 가야산 상왕봉을 아랫녘에서 보기 드믄 ‘석화성[石火星]’이라고 했다던데, 서운리 쪽에서 바라본 수리봉은 조그마한 ‘석화봉[石花峯]’이었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어우러지는 충주호가 쫘~악 펼쳐진다. 세상에~!  ‥‥‥.  “여기가 진짜다.” 앞쪽은 물론이고 양옆까지 물바다이다. 충주호, 충주호 하는데, 충주호의 모습을 이렇게 멋있게 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물가에 봉우리들

봉우리 사이사이 골짜기들

봉우리 앞에 물

봉우리 너머 물.

골짜기마다 물, 물, 물.


사람이 산천을 대할 때, 그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것은 눈이고, 시원한 바람결을 맞아들이는 건 몸통이다. 그럴 때 가슴은 끝 모르게 부풀어 오르며, 입은 즐거움에 겨워 비명을 토한다. 행복이란 말은 좀 속된 느낌을 준다. 가끔 자연이니 섭리니 하면서 이론을 펴는 것은 알량한 인간의 머리다. 머리와 가슴을 싣고 걷는 건 다리와 발. 다리와 발은 말이 없다. 그저 걷는다. 오늘, 대견스런 두 다리가 뿌듯한 마음을 떠받친다. 음양지에서.


충원교(08:20)-선착장-서운리(11:20)-수리봉-수리재(12:20)-미라실(13:50)-음양지(15:20)


― 미라실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 ―


조선 명종 때, 지동을 거쳐 청풍으로 가던 이지함이 이곳 미라골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밝은 달밤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나 개울을 건너더니 보이질 않는다. 걱정이 되어 개천을 건너 뒤따라 가보니,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객방주인이 말하기를 “개천 건너 겹친 기슭에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튿날 객방주인을 따라 그 마을을 찾아본 토정이 탄복하기를, “옥녀봉 아래 그토록 오래 있었으면서도 바로 이웃에 있는 길지를 왜 알지 못했나?” ‘늦게 알았다’ 해서 ‘만지(晩地)’라고. ― 미라실과 만지 마을 많은 부분은 지금 충주호 물 속에 잠겨 있다.

(2006.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