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12:58ㆍ충주O
11월 5일. 천둥소리에 깨어 눈을 뜨니 번갯불이 번쩍인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깐 망설이다가 채비를 한다. ‘양지 바른 길만 바랄 수 있는 건가 어디.’
이른 여덟 시 이십오 분, 36번국도에서 내사리 진말마을로 갈라지는 길. 지난 주, 수안보에서 공이동을 거쳐 와 멈췄던 그 곳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이제 비는 그치고, 아주 옅은 안개가 드문드문 서려 있다. 통통한 김장배추가 밭에 그득하고, 굵직굵직한 무 뿌리는 한 뼘씩 솟아 파란 잎줄기 밑에서 파랗다. 논바닥엔 타작한 볏짚이 줄지어 서있고, 그 옆 밭에는 팥 낟가리가 몇 개 서 있다. 푸른빛이 남아 있는 팥 단을 말려 털면 붉거나 푸른 팥알이 오르르 쏟아질 것이다.
까~악 까~악, 깍깍. 까막까치 소리가 이따금 들리고, 재잘대는 산새 소리에 새매 소리가 가끔 섞인다. 멍멍 개 짖는 소리는 가끔씩 쳐대는 징소리 같다. 질척거리지 않을 만큼 젖은 흙바닥에 갓 떨어진 낙엽들이 깔려 있는 길이 좋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성당에 앉아 미사 시간을 기다리는 중, ‘왜 여기 와 앉아 있는 건가?’ 하는 때가 가끔 있다. 지금은 왜 걷고 있는 건가?
하재오개에서 남벌 쪽 임도를 찾아 든다. 지난 해 봄, 찔레꽃 피던 무렵, 충주호와 산이 어우러지는 경치에 얼을 빼앗겼던 길. 고개를 넘어 그윽한 숲 속으로 스며든다. 길바닥에 좍 깔려 있는 낙엽. 사람 냄새가 전혀 없는 길. 신비로움이 감도는 세계를 걷는다.
마냥 묻어나는 단풍.
쉬지 않고 온 산을 헤매는 귀여운 바람.
솨~솨 노래를 하는 잎가지들.
비 뿌리듯, 눈 날리듯 분분한 낙엽들.
꿈결 더듬는 나그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번엔 물이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는 물, 좌~악 펼쳐지는 호수. 그리고 작은 섬들. 가을빛 담은 물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멀고 가까운 산허리에 갇혀 있는 물, 검푸른 빛깔 위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물이 한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 “물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이 물에서 나왔고, 물에서 힘을 얻어 살아간다. 그러한 물이 가끔 난리를 피우면 생명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망가진다. 올여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 죽고, 쓰러지고 했던가? 그리고 오랜 가을 가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곤란을 겪고, 동식물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가?
아, 지금 깨달았다. 알량한 입으로, 속된 문자로 자연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김밥 한 줄로 요기를 하고, 몇 걸음 옮기니 남벌이다. 남벌에서 마즈막재까지는 포장도로이면서도 좀 한가하다.
마즈막재에서 충주댐 쪽으로 가는 길 가에 ‘일향산[해맞이동산]’이 있다. 계명산 휴양림 맞은편에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에, 청풍 오현봉수와 대소원에 있는 마산봉수를 이어주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옛 이름은 ‘심항산’ 또는 생긴 모양으로 해서 ‘종뎅이산’이라고. 광복50주년이었던가? 전국 봉수대를 잇는 행사에 참가하여 저 봉우리에 올라갔었다. 길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8월이니 풀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 꽤나 고생을 했다. 여우 똥 대신 토끼 똥 한 자루에 몇몇 준비물을 가지고서. 여우 똥을 태우면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기 때문에 봉수를 올릴 땐 여우 똥을 썼다는 얘기도 그 때 들었다. 그 후, 어떤 자리에서 토끼 똥 지고 산에 갔었다는 말을 했다가 ‘뻥쟁이’로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허허허.
늦은 두 시. 휴일 나들이 차량이 붐비는 충주댐 충원교에서 차를 기다린다.
내사리 진말(08:25)-하재오개(10:10)-남벌(11:50)-마즈막재(12:50)-충주댐 충원교(14:00)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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