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대소원-수안보]

2008. 2. 27. 12:56충주O

2006년 10월 22일 일요일 이른 여덟 시 대소원.

묽고, 짙은 안개가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다. 애초에 ‘만정리-산정’으로 해서 가려던 길을 금곡 곧 쇠실 쪽으로 바꾼다. 괴산군 지역을 잠깐 빌려야 하는 길이지만, 만정리까지 가는 동안 부대껴야 할 요란한 자동차 행렬을 피하고 싶어서다.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다. 아주 좋은 가을 아침 길. 적당히 안개가 서려 있을 때 단풍은 진땀을 흘리면서 더 가깝게 다가온다.


쇠실고개에서부터 말구리고개까지 정확하게 한 시간 동안 괴산군 지역 길을 빌렸다. 배극렴이 은둔해 있을 때 태조 이성계가 세 번 찾아왔었다는 삼방(三訪)을 지나고 정인지 묘소가 있는 외령리 반능을 거쳐서 사현까지.


과수원엔 빨간 사과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고, 저기 산골 논다랑이에는 어린아이들 서넛이 메뚜기를 잡느라고 이리저리 튀며 왔다 갔다 한다. 흐릿한 하늘, 안개, 울긋불긋한 산 빛, 그 속을 걸어가는 가을 나그네. 트랙터를 몰면서 핸드폰 전화를 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문명 세상을 생각한다.


사현에서 말구리고개를 넘으면 충주시 이류면 탄용리 숯골이고, 이어서 매현리 매산이다. 매산은 나의 살던 고향이다. 나서 자랐고, 초등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명절을 쇠는 곳이다. 그러니 눈을 감아도 길은 훤하다. 충주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아보자는 길에 내 고향길이 포함된 것. 바로 저 산 너머는 괴산군이다.


저 위쪽에 온수골이 있다. 예전에,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나왔었단다. 그러던 어느 해,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지내는 고사를 소홀히 한 탓에 따뜻한 물의 맥이 수안보로 옮겨갔다고 한다. 호암동 함지못에서 수안보 방향에 있는 싸리고개 너머에도 이 비슷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도 수안보 온천 근방이기에 생겨난 이야기들일 게다.


― 숯골, 궁골, 닦은터, 매골, 덕지골, 지당골, 마그랭이, 매봉재, 한터, 참나무골, 풍무골, 약싸리봉, 다리목, 이시당골, 수름재, 서당골, 벌터, 새말림, 달은터 ‥‥‥.


마을을 둘러싼 곳곳의 지명들이다. 산과 골과 들이 모두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쌀이나 보리, 콩과 팥, 조나 수수 등등의 곡식은 물론이고, 버섯이나 산열매, 산나물을 얻어야 했고, 겨울엔 나무를 해다 때야만 했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을 사람이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알아야 했고,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될 수밖에 없던 이름들이다.


허나 요새는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가고 있다. 오히려 그런 걸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프고,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들에게, 가야 할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 대신 다른 일에 몰두해야 하는 이들에게 그런 이름들을 들먹이는 건 오히려 귀찮은 일일 수가 있다.


사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름과 그에 담긴 사연들도 사라진다. 삶의 양식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은 옛날로, 옛날로 흘러간다. 아! 인생무상인가, 만물유전인가.


내가 살던 집 뒤에 있는 학교도 전교생이 600여 명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10여 명 정도의 분교로 변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시집온 앞집 아주머니는 명절 때마다 손자 손녀를 기다리는 할머니가 되었다. 먼 길을 떠나거나 돌아왔을 땐 반드시 부모님께 큰절로 고해야만 했던 풍속을 요즘 아이들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쯤으로 여긴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이종구 작사 / 권길상 작곡)


길옆을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를 불러본다. 산골 아이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저 냇물을 빤히 들여다보았고, 머릿속으로는 폭이 넓게 흐르는 강물을 그렸고, 파도 사납고 넓디넓은 바다를 동경했었다. 그리고 지금, 강에도 가 보고, 바다에도 가본 눈으로 그 때 그 냇물을 다시 내려다본다. 물줄기는 그 빛이로되, 냇물 어깨는 그 모습이 아니로다. 나그네로 변신한 어린아이가 냇물을 따라 흘러간다. 수주강 쪽으로.


수주에서 팔봉으로 흐르는 강이 수주강이다. 내 어린 시절 많은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물줄기! 다슬기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멱을 감기도 하던 강물이다. 초등학교 소풍 때 강가에 다다르면 제일 먼저, 엎드려서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강물에 들어서면 온갖 어린 물고기들이 함께 놀아줬었다. 갓 부화한 새끼 자라들을 붙잡아다 직육면체 유리 어항에 넣어 교실 창턱에 두기도 했었다. 백사장 흰 모래 위로 흐르는 물은 그 이상 깨끗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삿대로 나룻배를 저어 건너 마을에도 가고, 어느 겨울에 옥녀봉에도 올랐었다. 옥녀봉은 지금 고운 치맛자락을 강물에 닿도록 드리우고 있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저 모습은 예전과 같고, 산 그림자를 담은 물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가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병풍처럼 둘러선 산벼랑

첩첩 산봉우리 위로 이어지는 긴 하늘.


팔봉을 지나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석문천 가를 걷다가 문강에서 개울로 내려간다. 아! 개울 바닥에 불긋불긋 꽃이 핀 줄 알았다. 물고기 알들이다. 극심한 가을 가뭄에 풀잎과 나뭇잎이 말라비틀어지는 걸 보았지만, 저렇게 많은 물고기 알들이 노천에서 말라가다니! 어떤 것은 수면에서 40~50 Cm 위에도 붙어 있다.


돌고개를 넘는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유영경이 팔봉에 있는 형 유영길에게 식료품과 옷감 등을 보냈단다. 유영길이 그 물건들을 거부하여 도로 지고 넘어갔다는 고개, 도로고개 ― 돌고개. 선물과 뇌물의 의미를 잠깐 생각하다 보니 원통 마을. 배가 좀 고프지만, 급작스런 애사를 당한 옛 친구 소식이 벨을 울리니, 목적지 수안보까지의 길을 재촉한다. 수안보 입구에서 비를 맞는다. 이 얼마만의 빗방울인가! 빗방울아 좀더 세게 내려라. 좀더.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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