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음식

2008. 4. 1. 15:12동서남북

추억 속의 음식 - 영혼의 소리를 듣다

이호태

 

 

추억 속의 음식이라‥‥‥.

어렸을 때 산골에서 먹던 보리밥이며, 열무김치, 칼국수, 김장김치 곁들인 삶은 고구마, 최근 이리저리 나다닐 때 만나는 잡다한 먹을거리들을 떠올려 보니, 다들 나름대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은데, 딱히 내놓고 떠벌릴 만한 것이 집히질 않는다. 허나, “알았어.” 하고 대답을 해 놓은 마당에 얼버무려 빼기도 그렇고 해서 생각해 본다.


10년도 더 전에, 몇몇이서 국망산엘 간 적이 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난 와서 서울 쪽을 바라보던 산이라고 전해지는, 노은과 앙성 사이에 있는 산이다. 하남 고개에서 올라 노은면 수상리로 내려와서는 수상초등학교 앞에서 하산주를 마셨다. 마을 사람들 말고는 우리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찾는, 전문 음식점이 아닌 집. 거기서 막걸리 안주로 먹었던 두부찌개 얘기다. 일행이 대여섯 되는 것을 본 주인 아주머니가 어렵게 한 마디 하신다. “돈을 더 내야 되겠는데요.” 보통 차려 내는 찌개보다 두부 한 모가 더 들어가야겠다는 얘기다. 당연히 받아야 할, 그래 봐야 시내 음식점에 비하면 값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그 순박한 마음에서부터 찌개 맛은 우러난다. 조그만 시골 동네 정경까지 녹이며 보글보글 끓던 냄비! 칼칼한 국물 맛이 그립다. 연발되던 “좋다!” 이 밖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난 겨울방학 때, 세 분 선생님들과 함께, 범바위에서 발티재를 넘어 울진까지 걸어갔었다. 엿새 동안 걸어 도착한 바닷가에서 먹었던 생선회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만, 중간 중간 만난 음식들에서 느낀 그윽한 정취가 떠오른다.

 

풍기에서 점심으로 먹은 순두부 백반은, 예전에 두부를 만들 때 가마솥에서 엉기는 순두부를 무명 자루에 담아 맷돌로 누르기 전에 퍼내어 간장을 타 먹던 그 맛을 느낄 수 있었고, 봉화 읍내 끄트머리 구멍가게에서 먹은 순두부찌개는, 찌그러진 주전자와 함께, 그곳에서 삶을 얘기하던 숱한 사람들의 온갖 애환을 떠올리게 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들어선 돼지국밥집. ‘억지춘양’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춘양의 장터에서다. 주인아주머니는, 산 넘고 물 건너고 들을 지나 걸어 다니던, 먼 옛날 친정 나들이 추억을 국밥에다 말아 주셨다. 번성하던 시절의 춘양 장터 얘기까지 넣어 구수하게 말아주셨다.

 

날이 저물어 잠잘 곳을 찾아 헤매다가 가까스로 찾아 들었던 울진군 서면 삼근리 민박집.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월 열 나흗날이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식기에 밥을 푸고, 묵나물과 된장국, 김장김치 등으로 차린 밥상. 요란스레 내세우지 않으면서 때가 되면 차려 내던 진짜 ‘민속밥상’이었다. 우리 네 명은 그 밥상으로 지친 몸을 달래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밤새 눈이 내려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해 있었던 이튿날 새벽. 그 때, 낯선 곳에서 정월 대보름 음식으로 받은 저녁밥상과 아침밥상. 이 또한 추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추억 속의 음식!

어떤 것이 그 음식을 추억 속에 간직하게 하는 것일까? 희귀한 재료일 수도 있고, 그럴 듯한 분위기일 수도 있고, 손맛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음식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추억 속에는 인간 영혼의 가장 순수함을 느끼게 하는 음식들이 있다. 꾸밈없이 소박하고, 어떤 셈을 생각지 않고 차려낸 음식. 애써 드러내지 않더라도 저절로 느껴지는 순수함. 그렇게 순박한 정성으로 차려낸 음식. 그래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며 먹을 수 있는 음식. 나의 추억 속에는 그런 음식들이 끼어 있다. 국망산 밑에서 먹었던 두부찌개, 풍기와 봉화에서 먹었던 순두부, 춘양 장터 돼지국밥, 삼근리 보름밥상. 나는 지금 그 때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영혼들의 깨끗한 숨소리를 듣는다. 이 땅에 살아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듣는다.(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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