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꽃 이어지던 길에 붉은 열매가[겨울 산수유길]

2009. 1. 3. 20:50충청

송구영신. 서울 동생네 집에 동기간들이 모여 모처럼 오붓하게 해를 넘기고 내려왔다. 저녁엔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와 소주잔을 나누면서 푸근한 새해 첫날을 보냈다. 어제 아침에 자동차보험을 갱신한 일 말고는 한갓지게 틀어박혀 있다가 오늘 오후 한 바퀴 돌아본다. 1월 3일 토요일 맑음. [집 - 무불통사거리 - 안심 - 마즈막재 - 남산성 - 안림사거리 - 무불통사거리 - 집]

 

 

희망을 노래할 시간에 세상을 뒤덮고 있는 그림자가 꽤나 무겁다. 나라 안팎의 암울한 경제사정, 노골적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 무기력한 야당, 추운 겨울을 팍팍하게 살아가는 서민들, ‥‥‥. 그래도 웃자. 웃으면서 희망을 키우자. 우리 인류는 위기 때마다 한 단계씩 발전해왔다더라.

 

 

추워진 날씨에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고 집을 나선다. 가자. 마즈막재로 해서 남산성을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목적지를 생각하지 말자. 어디까지, 얼마큼 가느냐보다 그냥 걷는 걸 즐겨보자.

 

 

화이부동(和而不同). 새해에 교수들이 꼽은 희망 사자성어다. "화합하되 소신 없이 남을 따르지 않는다." 교수들은,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인식과 태도가 정착되어 지금보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이념과 계층, 남북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하자"는 뜻으로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 모든 게 똑 같을 수야 있나. 다양한 개성이 함께 어울리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이고, 즐거운 세상이 아닌가?

 

 

어느새 마즈막재. 오랜만에 걷는 것도 아닌데, 다리가 뻐근하다. 약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남산으로 들어선다.

 

 

동거(同居). 함께 사는 세상이다. 너와 나,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빛을 받고, 같은 볕을 쬐고,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간다.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리저리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다. 마음과 뜻이 통하면 가까워지고, 어긋나면 틀어져 멀어진다지만, 얼마나 가까워지고, 얼마나 멀어질까? 사랑한다고 매일, 한 몸처럼 붙어 살 수 있을까? 미워한다고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한 가슴에서 나오고, 좋은 사람 미운 사람은 가까운 곳 먼 곳 가리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나 늘 있게 마련이다. 모두가 한 하늘 아래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던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고 섞이듯,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이리저리 부대끼는 것, 동거하는 것이다. 애증에 관계없이 함께 사는 세상이다. 여당과 야당이 극한 대립을 보이고, 분분한 의견이 여기저기서 맞선다. 남북갈등이 심화되고,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심하게 한바탕했다. 욕설에 난투극까지 벌이는 여야는 국회에서 동거하고, 분함을 못 이겨 부르르 떨며 다투던 아내와 나는 함께 산다. 직장에서 이웃에서, 사람 사는 어디에서건 사랑과 미움이 동거한다.

 

 

지난봄에 걸었을 때, 껌뻑이는 노란 꽃을 잔뜩 달고 가물가물 이어지던, 남산임도 산수유나무엔 빨간 열매가 잔뜩 달려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투명한 듯 빨갛게 빛나는 산수유열매는 가지마다 나무마다 모기떼처럼 달라붙어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봄에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봄에 괴롭나니.

 

 

법구경 한 구절 떠오른다. 사랑스런 사람도 사랑하고, 미운 사람도 사랑할 수는 없는가? 고통스런 그리움도 사랑하고, 보기 싫은 고통도 사랑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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