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24. 23:16ㆍ경기
예로부터 관악산(해발 629미터)은 화기(火氣)가 있는 산이라고 했다. 실제로 해질 녘에 뚝섬 쪽에서 보면 노을에 물든 바위 봉우리가 불붙는 듯 보인다고 한다. 조선 초기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무학대사가 궁궐 방위에 문제를 제기했고, 관악산의 화기가 궁궐로 옮겨 붙는 것을 막기 위해 광화문에 해태상을 세웠으며, 관악산 곳곳에 물동이를 묻었다고 한다. 산 정상 부근에 연주사와 원각사를 지은 것도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난해에 불에 탄 숭례문의 현판 글씨가 세로로 쓰였던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임진왜란을 겪은 것도, 일제 침략을 비롯하여 남쪽 바다를 타고 몰려온 서양 세력에 500년 사직이 무너진 것도 남쪽으로부터 오는 화기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탓이라고도 한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어떤 섭리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인가? 오늘 관악산엔 이따금씩 작은 빗방울들이 떨어지곤 한다. 불기운을 재우는 토닥임인가?
2009년 2월 24일.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가로질러 산으로 들어선다. 연주대로 이어지는 능선 바윗길이 재미있고, 하늘을 이고 있는 바윗덩이들, 소나무들은 저마다 멋을 부리고 있다.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가끔씩은 햇빛이 나는 둥 마는 둥, 흐린 하늘 아래 서울시내 건물 숲이 보이는 둥 마는 둥. 바위절벽 위 암자, 방송중계시설, 기상대, 크고 널따란 바위 비탈과 거기에 앉아 있는 바위에 새겨진 산 이름[冠岳山], 모여 앉아 볕을 쬐는 비둘기 몇 마리, 부연 하늘 아래 서울시, 과천시, 안양시, 삼성산, 청계산 등 사방을 둘러보며 서성이는 나그네. 하얀 고무신을 신고, 바위 위를 가볍게 오가는 사람이 있어 말을 붙이니 기상청 직원이란다. 산에 대해, 연주대에 대해, 등산로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연주암 점심 공양도 알려준다.
좀 기다리니 공양시간. 잘게 썬 김치와 고추장으로 비빈 밥, 어렸을 적 할머니께서 비벼주시던 맛이 아련하다. 생뚱맞게 계란 프라이를 생각하는데, 스님이 지나가신다. 속으로 허허 웃으며 시래기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 먹는다.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산꼭대기 절집 마당에 커피 자판기가 있다. 대웅전과 종각, 크지 않은 마당을 어슬렁어슬렁, 두리번거리며 홀짝이다가 길을 정한다. 팔봉능선을 지나 무너미고개로 해서 관악산공원까지.
오늘, 관악산의 화기는 찌푸린 하늘과 몇 개 빗방울이 재워주고, 나그네의 엊저녁 취기는 관악산이 가셔주는구나.
* 서울대 - 능선 - 연주대 - 연주암 - 팔봉능선 - 무너미고개 - 관악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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