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6. 08:54ㆍ전라
2010년 9월 25일 고창 선운산. 꽃무릇이 지천이다. 길가에, 나무 밑에, 여기에, 저기에 피어 있는 꽃무릇. 붉은 빛깔 꽃 바다에 온몸이 흠뻑 젖어 걷는데 서늘한 실바람이 여문 햇볕에 섞여 살갗을 간질인다.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절집 담장 오른쪽 길을 잡아 산으로 들어서는 길이 한적해서 좋다.
잠깐 사이에 등성이로 올라서니 누런 들판 끝에 서해바다. 산과 들과 바다와 섬이 어울려 한 풍경을 이루고 하늘은 맑다. 엊그제 추석날, 한 이틀 전국을 물바다로 만들던 비구름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높푸른 하늘에 양털구름이 물고기 비늘처럼 떠있다. 건너편 산봉우리 위로는 뭉게구름. 수리봉[도솔산] - 개이빨산 - 낙조대 - 마애불 - 도솔암 -진흥굴 - 선운사로 이어지는 가벼운 걸음. 날아갈 듯 솟아 있는 바위들, 내려다보이고 건너다보이는 바위와 나무, 초가을 햇빛과 산 속 맑은 공기, ‥‥‥.
선운산(禪雲山) 또는 도솔산(兜率山). 산 이름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일을 선(禪)이라고 하는데, 산 위에서 하얀 구름을 바라볼 때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불교에서,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에 있는 도솔은 석가여래가 보살로 있으면서 세상에 내려올 때를 기다리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미륵보살이 설법을 하면서 미래불로 내려올 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도솔천에 머물면서 오로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생각에만 잠겨 있었을 석가여래의 마음이야말로 한없이 고요했을 것 같다. 미륵보살 또한 그렇게 도솔천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낙조대에는 사방의 경치에 취해 있는 사람들로 붐비고, 마애불과 도솔암에도 보물급 유적을 답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각각 보물1200호, 280호. 도솔산(兜率山) 또는 선운산(禪雲山). 이 세상을 구제하러 올 미륵이 참선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곳인가? 누가 미륵을 기다리는가? 한 많은 인생. 뭇 민초들의 삶 겹겹에 켜켜이 쌓이는 한, 사랑하고 미워하는 동안에 쌓이는 한, 짓밟히고 빼앗기고 속아 넘어가는 동안에 쌓이는 한. 세상 모든 고통을 한방에 날려버릴 구원자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또한 한이 되어 민중의 가슴속에 알게 모르게 쌓여간다. 석가여래가 오셨고,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 분들의 가르침은 ‘말씀’으로만 요란할 때가 많은 이 세상이다. ‘말씀’을 내세워 감언이설을 펴면서 민중을 농락하는 무리가 판을 치기도 한다. 그렇게 어지러울수록, 핍박이 혹독할수록 민중에겐 구세주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간절해지는 법. 견훤이나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했었고, 홍길동은 의적으로 불렸다. 정여립의 대동사상, 최재우의 동학,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이었을 것이다.
신라 때 진흥왕이 와서 수도했었다는 진흥굴과 천연기념물354호라는 장사송이 발길을 잡는다. 서성이며 바라보며, 사진도 찍는다. 개울가로 이어지는 평탄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는 걸음이 즐겁다. 아까부터 앞뒤 양옆 곳곳에서 눈길을 잡아당기는 꽃무릇들. 오늘 하루 실컷, 아주 실컷 본다. 꽃무릇의 꽃말은 ‘슬픈 운명’ 또는 ‘슬픈 추억’. 예수님이 오셨고, 부처님이 오셨지만 고통과 혼란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 대동사상도 햇볕정책도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이 세상. 꽃무릇 붉은 빛깔 속에 세상의 이치가 배어 있는 건가? 산 어귀에 있는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 ‘송악’[367호]은 두릅나뭇과에 속하는 상록 활엽 덩굴식물로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자라난다고 한다.
차에 오르기 전 풍천장어에 복분자 술 한 잔은 필수. 유병귀 최광옥 이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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