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몸으로 느끼는 것[한라산]

2008. 2. 27. 10:10

2007년 1월 26일 새벽녘, 제주시내엔 비가 살살 뿌린다. 며칠 전부터 눈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들어온 터라 단단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성판악 입구에 서니 어둠이 가시면서 날씨가 갠다. 포근하고 상쾌한 공기에 몸과 마음을 씻으면서 한라산 품속으로 들어간다. 여덟 사람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 잎 모양이 미끈미끈한 제주조릿대가 여기저기 숲을 이루면서 사람들을 맞고, 보내고 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젠 눈길이다. ‘이 정도쯤이야 ‥‥‥.’ 허세를 부려보지만 이내 아이젠을 착용한다. 햇빛이 비치는가 하더니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지고, 다시 어두워지고, 바람이 잦아진다. 진달래 휴게소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잔 마신다. 윗옷을 하나 더 껴입고, 신발 끈을 다시 묶는다. 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급해지고, 쌓여서 다져진 눈의 양도 더 많다. 어느새 바람은 사나워졌고, 안개가 자욱하다.


제주도에 몇 번 왔었지만, 한라산 정상에 오른 적이 없었기에 묵은 숙제를 하는 기분이다. 해발 1,950 미터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예부터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이라고 했다.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에 ‘두무악(頭無岳)’, 높고 둥글기 때문에 ‘원산(圓山)’이라고도 했단다. 이 밖에 부악(釜岳), 선산(仙山), 영주산(瀛主山), 혈망봉(穴望峰), 여장군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라산(漢拏山)’이라는 이름은,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以雲漢可拏引也]라고 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한라산 정상!

마구 불어대는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분명 정상인데 안개가 잔뜩 끼어 천지분간을 할 수가 없다. 그럼 백록담을 볼 수가 없는 건가? 아니다. 나는 보았다. 지금 보고 있다. 못 가득하게, 아니, 철철 넘치도록 진한 안개를 담고 있는 백록담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백록담의 모습이 이보다 더 멋있게 보일 때가 있을까? 저 밑에 물이 좀 고여 있고, 이따금 노루 몇 마리가 뛰어다니고, 무너진 돌무더기가 저 편에 쌓여 있고 한 모습을 어떻게 여기에 비할 수 있으랴. 햇빛이 밝게 빛나고, 주변에 꽃이 피어 있고, 하늘이 파랗고,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한들 저만할 수가 있으랴. 저렇게 신비로운 안개를 품고 있는 백록담. 사정없이 불어대는 바람은, 아무리 작은 티끌이라도 남김없이 쓸어가고, 가슴을 속속들이 씻어주겠다고 한다. 나는 백록담이 가장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 한라산 정상에 서 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몰아치는 바람을 한참 동안 서서 맞는다. 안개 자욱한 백록담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 조정철은 신미년에 방어사로 와서 이곳 절정에 이르다.


백록담 저 편 돌무더기 속에 있는, 부러진 마애각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고 한다. 조정철은 정조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귀양을 왔던 사람이다. 섬처녀 홍랑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데, 조정철 집안과 불구대천의 정적인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한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모역죄로 옭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홍랑에게 거짓 증언을 강요한다. 홍랑은 혹독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는다. 조정철은 피눈물을 삼키며 울부짖는다.


“‥‥‥ 

이제 모든 것이 이 거친 섬 한 사또의 계율에 달렸네.

어제 미친바람이 한 고을을 휩쓸더니,

남아 있던 연약한 꽃잎을 산산이 흩날려 버렸네.”


가까스로 풀려난 조정철은, 신묘년(순조11, 1811)에 제주에 부임하여 홍랑의 분신이자 핏줄인 딸과 함께 묘를 찾아 분향하고 비문을 세운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

‥‥‥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홍랑의 무덤은 지금 애월읍에 있고, ‘홍랑로[-路]’도 생겼다고 한다.


한라산 정상 부근에 구상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바람결에 날아다니는 하얀 눈가루를 조금씩 뒤집어쓰고 있는, 키가 크지 않은 구상나무들. 웬만한 바람에는 이골이 났는지라 가지를 좀 건들거릴 뿐 의연하게들 서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본 적이 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 금석학자이고,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다. 나는 그림을 잘 모르지만, 세한도에는 ‘인위적인 기교를 배척하는 선비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는 얘기를 기억한다. “극도로 절제된 소재와 구도 속에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 ‥‥‥.” 그림의 내용과 화법에 대한 설명을 떠올리면서, 백록담 바깥, 세찬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구상나무들을 본다.


아, 이제 내려가자.

관음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심한 경사에, 푹푹 빠지는 눈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에, 계속하여 불어대는 바람에‥‥‥. 신나는 하산 길을 신나게 달음질친다. 한참을 내려와 용진각 대피소에서 주먹밥으로 요기를 하고 나서는데 눈이 내린다. 처음에는 싸락눈이, 함박눈인가 했더니 가루눈이 되어 바람을 타고 뿌려댄다. 걷고 또 걷고, 타박타박, 터벅터벅. 관음사 안내소 옆 휴게소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걸음을 접는다.


오늘, 성판악 입구까지 오는 차 안에서 운전기사가 말했다.

 ― 제주도에는 ‘삼바’가 있다. ‘바람’, ‘비바리’, ‘다금바리’.


오늘, 백록담이 나에게 말했다.

 ― 세상의 참모습은 안개 속에 있느니라.


오늘, 한라산 정상, 백록담 바깥에서 불어대던 바람이 나에게 말했다.

 ― 사물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니라.


------------

성판악 입구(07:30)-진달래밭-정상(11:25)-용진각(중식)-탐라계곡-관음사 안내소(14:30)

(2007.01.26)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가 아니라 호수 그리고[사량도 지리산]  (0) 2009.08.18
강화도마니산  (0) 2009.07.06
님은 갔지만은[마니산]  (0) 2009.07.06
삶과 죽음과 숨결[거금도]  (0) 2009.03.16
백록담을 향하여  (0) 2008.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