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10:18ㆍ충청
일찍부터 노랗던 생강나무는 빙긋빙긋 느긋하고, 갓 피어난 찔레순은 살짝살짝 두리번거린다. 여기 버들개지는 큼직한 눈망울을 아직도 껌뻑거리고, 저쪽 버드나무는 가지 끝이 파랗다.
돌돌돌. 산골 도랑은 경쾌한 소리로 흘러가고, 딱따구리는 쉬지 않고 나무를 쪼아댄다. 콩새 소리, 새매 소리, 구구구 산비둘기 소리, 이름 모를 멧새들 소리에 가끔가다 멧돼지가 크르릉 끼어든다. 저벅저벅 나그네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이끼 낀 돌길엔 작은 나비들이 나풀나풀 나닐고, 멧돼지가 먹잇감 찾느라고 마구 파헤친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화전 터엔 복숭아 붉은 꽃봉오리가 금방 터질 태세이고, 키 작은 야생화들은 땅 위에 바싹 붙어 다투어 피고 있다. 자주색, 노란색, 연두색, 파란색, ‥‥‥. 숲이 우거지기 전에 햇볕을 쬐고, 그렇게 종족을 보존하겠다는 거란다.
드디어 갈은구곡, 갈론계곡에 왔다. 처음엔 ‘갈은(葛隱)’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갈론(葛論)’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계곡 입구에 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은거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괴산군 칠성면 사은리/괴산댐 위쪽에, 옆으로]
산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서, 군자산, 남군자산, 옥녀봉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모처럼 산 공기에 흠뻑 젖어가면서 산비알과 싸움도 해보고 하다가 내려왔다. 계곡이 얼핏얼핏 보이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부터 온몸이, 내장 줄기까지 속속들이 씻겨지는 듯하다.
葛隱洞門(갈은동문), 七鶴洞天(칠학동천), 古松流水齋(고송유수재), ‥‥‥. 미끈미끈하고 기묘하게 생긴 바위마다 시원시원한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옛날에도 사람들이 꽤나 찾아왔었음을 알겠다. 선국암, 강선대, 구암, 금병, 갈천정, 옥류벽 등 ‘갈은구곡(葛恩九谷)’이라고 했단다. ‘曲(곡)’과 ‘谷(곡)’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으되, 여기엔 ‘谷(곡)’이라고 한 것에 눈길이 간다. ‘갈은(葛隱)’이라는 이름은 ‘칡이 많이 우거져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와서 보니, 화양동 계곡[화양구곡]이나 송계 또는 억수계곡[용하구곡]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규모가 크지 않고, 바깥으로 떠들썩하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골짜기 형세도 정말 꽁꽁 숨어 있는 모양이다. 골짜기 초입부터 끝까지 사람 그림자는 내 것 하나다. 정말로 신선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자리를 뜨기가 싫고, 계곡을 벗어나기가 싫다. 한참을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 위로 드러난 바위와 돌들을 골라 디디며 아주 천천히 움직여 본다.
맑은 공기, 맑은 햇빛, 맑은 산 빛에
맑은 소리로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
따라서 맑아지는 나그네 눈귀와 머리와 가슴.
옥류(玉流), 옥계청수(玉溪淸水). 아무리 애를 써도 다르게 이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옛 사람들이 왜 ‘옥(玉)’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신선들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너른 바위 위엔 봄볕이 조용히 내려와 반짝반짝 웃고 있다. 강선대에 놀던 신선 자취 가물가물한데 흐르다가 머뭇거리는 물위에 원앙 한 쌍이 유유히 떠다닌다. 옥같이 부셔지며 흐르다가 고이고, 고였다간 넘쳐흐르는 시냇물. 도저히 글로 적어내지 못하겠다.
차마 그 물소리 밟으며 내려오는데,
두어 걸음 앞에 도마뱀이 재빠르게 기어가고,
보랏빛 연기로 서려 있는 진달래가
손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소나무 아래서, 바위 옆에서.
(2007.04.06)
'충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보사랑 두 돌 (0) | 2008.02.27 |
---|---|
꾀꼬리봉은 용하구곡의 내력을 알고 있다 (0) | 2008.02.27 |
봄비 맞으며 (0) | 2008.02.27 |
국망산을 넘고 보련산을 넘고 쇠바위봉을 넘었다 (0) | 2008.02.27 |
신선놀음 하다가[금수산] (0) | 2008.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