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10:21ㆍ전라
― 4월 14일, 모악산엔 꽃 잔치가 한창이다.
길 가에, 절 주변에, 산허리에 벚나무가 많다. 저만치에 듬성듬성 하얗게 또는 연분홍 기운을 살짝 곁들여서 수를 놓았고, 가까이에선 바람결에 꽃비를 뿌려댄다. 어떤 나무엔 하얀 꽃떨기 사이사이 파란 잎이 자라고 있어 제법 생기가 돌고 있다. 산발치에선 새하얀 조팝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고, 절집 담장 가에는 만첩홍매화 붉은 꽃이 매혹적이다. 조팝꽃은 보석떨기마냥 눈이 부시고, 홍매화 붉은 빛은 진하다 못해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듯하다. 이름모를 나무, 이름모를 꽃들이 햇빛을 받아 화사하고, 숲 속엔 손톱만한, 노란 꽃들이 마른 풀잎, 마른 가랑잎들을 헤치고 피어 있다.
― 호남평야에 우뚝 솟아 수많은 절을 품고 있는 산.
넓디넓은 호남평야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산, 계룡산과 더불어 민중 신앙의 텃밭으로 알려진 산, 모악산엔 유난히 절이 많다. 금산사, 귀신사, 대원사, 수왕사, 천황사, 금선사, 청련사, 심원암, ‥‥‥. 대개 절집은 명당에 자리하고, 명당 설화를 전하기도 한다. 모악산엔 그렇게도 명당이 많은 것인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모악산 서쪽 금구와 만경 두 고을은 샘물이 맑고, 살기를 벗은 산세가 들 복판으로 꺾여 돌고 있으며, 두 줄기 물이 감싸듯 흘러 정기가 풀리지 않아 살 만한 곳이 제법 많다.”고 했다. 모악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들이 너른 들판을 적시면서 신령스런 정기를 나눠주고, 곳곳에 살기 좋은 기운을 모아놓았다는 말인가? 모악산 주변에 있는 김제, 정읍, 전주 등지를 여행할 때, 음식이 늘 맛있고 푸짐했던 걸 생각하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세워졌고(599년),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중창하여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소실과 중창을 거듭해왔다고 한다.
금산사에는 국보 62호 미륵전을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 무려 10 개나 있다. 절집 마당이 널찍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이 날렵한 모습으로 중심을 잡고 있다. 3층으로 된 미륵전의 웅장함, 언덕 위에 서있는 커다란 오층석탑, 검은색 돌로 특이하게 만들어진 육각다층석탑, 그리고 마당가에서 예스러운 멋을 풍기며 서 있는 작은 집들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나와 경내를 감싸는 듯하다. 이리저리 거닐어 본다. 진하게 붉은 꽃송이를 다닥다닥, 잔뜩 달고 있는 만첩홍매화가 있고, 눈부시게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벚나무가 또 한 그루 서 있다. 서서히 관람객 숫자가 늘어나면서 관광지 분위기로 넘어간다. 이 또한 명성에 어울리는 일일 게다.
― 미륵신앙의 발원지에 감금된 미륵.
금산사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발원지라고 한다. 미래의 부처, 구원과 희망의 부처인 미륵보살. ‘미륵’은 범어에서 온 말로 ‘자비를 갖춘 분’이란 뜻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미륵을 자처한 사람들이 좀 있었지만, 그럴 듯한 말과 글로 세상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는 없을까. 신라 말, 혼란기에 살기 좋은 새 세상을 열겠다면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도 ‘미륵세상’을 부르짖었다고 한다. 아들 신검에 의해 이 금산사에 감금됐던 견훤은 정말 미륵이었을까? 세속의 힘이 미륵신앙의 발원지에 가둬 둔 미륵이었나?
― 걷고 있는가?
푹 쉬는 기분으로 여유를 부리다가 산으로 올라간다. 금산리 주차장-금산사-청룡사-능선-배재-장근재-정상-심원암 뒤 능선-금산사-주차장. 정상에 오르니, 전주시내가 보이고, 김제평야가 펼쳐진다. 상학, 증인리, 금산사, 이쪽저쪽에 있는 등산기점들이 다 내려다보인다. 육산이고, 길은 밋밋하다. 잠깐씩 멈춰 서서 훤하게 펼쳐지는 사방을 바라다보고, 골짜기에 깃들인 절집들을 내려다본다. 금산사가 지니고 있는 오랜 유서와 보물들을 생각해 보고, 산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본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인가?
(200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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