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너머 골짜기[피아골 ― 뱀사골]

2008. 2. 27. 10:47전라

2007년 11월 4일 일요일 날씨 맑음.

지리산 피아골과 뱀사골을 걷다.


6.25 한국전쟁을 즈음해서 활약한 지리산 빨지산[파르티잔] 이야기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야사와 정사를 흥미롭게 넘나들고 있다. 몇몇 소설과 회고록에선 피아골이란 이름이 빨지산들의 피로 물든 골짜기란 뜻이라고 말한다. 또는, 단풍 빛깔이 핏빛처럼 선명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근대 이전,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피아골 입구에 있는 마을 이름은 ‘피밭’이란 뜻을 가진 직전(稷田)이고, ‘피밭골’에서 음이 변해 ‘피아골’이 됐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살았던 덕에 ‘피’는 벼와 함께 자라면서 벼농사를 해치는, 벼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풀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벼논에서 피를 뽑아내는 일을 ‘피사리한다.’고 하는 것도 알고 있다.


이름이 먼저냐, 뜻이 먼저냐. 어느 것이 먼저이든 그럴듯한 이름에 그럴듯한 뜻이 깃드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게 묘하게 굴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묘하다는 생각을 하고, 묘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세상만사 참으로 묘한 것이 인생길이다.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 눈 들어 보이는 산마다 붉게 타고, 길가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다. 온 누리가 단풍 물결이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 물결이다. 이제, 물결이 절정을 넘어서고 있다.


단풍은 산을 붉게 물들이고

흐르다 고인 물에 산이 비치니 물빛 또한 붉고

산 빛 물빛에 넋을 잃은 사람 또한 붉어진다?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이라. 피아골 삼홍소(三紅沼)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다. 절정을 넘어선 단풍 빛이 맑은 물 위에 차갑게 떠서 가볍게 흔들린다.


피아골을 지나고 임걸령을 지나고 삼도봉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 내려오니 화개재다. 백두대간에서 유일하게 장이 섰던 곳이라고 최랑이 말한다. 넓지는 않으나 물건을 흥정하고 교환하기에 충분할 만한 자리를 눈으로 둘러보고 먼 하늘을 바라본다. 사진도 찍고, 괜히 머뭇거리기도 하다가 뱀사골로 내려선다. 가고 가도 골짜기, 길고 긴 지리산 골짜기, 피아골과 뱀사골에 물소리가 우렁차다.


흐르다가 바윗돌에 부딪치면 하얗게 부서지고

맑게 고여서는 산과 하늘을 비추면서

깊은 바닥까지 죄다 내보인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곤두박질치는

깊고 긴 계곡의 물줄기여!

뱀사골을 빠져나와 거시기식당에서 거시기 동동주로 거시기를 하고 차에 오른다.


직전마을(06:30) ― 삼홍소 ― 피아골 대피소 ― 임걸령 ― 삼도봉 ― 화개재 ― 뱀사골 대피소 ― 반선(14:40)/ 유랑 최랑 신랑 이랑.

(200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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