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하 노피곰 도다샤[정읍단풍마라톤]

2008. 2. 27. 10:46마라톤

달님이시어 높이 떠올라서

멀리까지 비추어 주소서


저자거리를 누비고 계신가요?

험한 일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 짐 부려 놓고 좀 쉬십시오,

날 저물어 고생하실까 두렵습니다.

                           ― 정읍사(井邑詞)/의역


소금 행상을 나간 남편이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는 언덕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오지 않고, 저문 하늘엔 둥근 달이 떠오른다. 걱정이 된 아내는 달님에게 기원한다. 멀리까지 잘 비추어서 남편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끝내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지친 아내는 그대로 굳어서 돌이 된다. 남편을 기다리는 돌, 망부석(望夫石).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꼭 와야 하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기다리는 아내의 타는 가슴을 어이 다 말할 수 있으랴! 차가운 밤공기에 몸이 얼어붙고, 속은 타고 타다가 숯덩이가 되었다. 그 간절한 기다림과 그리움이 끝내는 한 덩이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 지극한 고통으로 얼룩진 기다림과 그리움은 지극히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두고두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나도 무언가 간절하게 그리워한 적이 있었던가?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던가? 글쎄다. 가끔,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릴 때가 있다. 할머님의 생전 모습을 그릴 때도 있다. 같이 생활하면서 고운 마음씨를 보여주던 사람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추석 무렵 둥근달이 서늘할 때면 초등학교 때 현희를 생각하기도 한다. 졸업 후 몇 년 안 되었던 때, 추석 전날 여러 친구들과 함께 만났을 때, 반가움으로 맞잡은 손에서 느꼈던 그 따스함을 생각한다는 것도 그리움일 수가 있겠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뜻인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에는 그리움도 함께 있을 법하다. 허나 막연한 그리움만을 가지고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기다려지고, 기다림에 지치면 그리움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일까? 그리움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는 것이고, 기다림은 욕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은 또한 확고한 믿음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때, 약해지는 믿음을 붙들고자 굳세게 마음을 다지는 그 의연함이야!


그 경계를 알 듯 말 듯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움과 기다림이 사무치면 고통이다. 고통으로 변한, 그 절절한 사연에 대하여 남이 함부로 말한다는 건 사치일 수도 있겠다. 허나 정읍사 여인의 기다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7회 단풍마라톤대회.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천을 따라가다가 고개를 넘으니 내장산 줄기가 길게 뻗어간다. 산은 위로부터 울긋불긋한 빛깔을 내려 보내는 중이고, 밑에선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다. 산에 번지는 단풍 빛깔이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든다.


단풍을 기다리던 사람들. 단풍이 아름답다고, 그 아름다움을 보겠다고 난리들이다. 그렇지. 얼마나 곱고 예쁜가? 더구나 단풍 무렵의 공기는 사람의 피부를 왜 그렇게 간질어서 마음까지 들뜨게 하는가?


곱고 곱다고, 비단결 같다고 감탄하면서, 단풍잎이 겪어온 계절을 생각한다. 단풍보다 더 예뻤던 새잎 시절에 시샘하는 바람과 추위를 겪었고, 뜨거운 햇볕과 무더위 속에 기진맥진하기도 했고, 온몸을 폭풍우에 내맡기기도 했다. 이제 가을 햇빛 아래에서 보여주는 저 고운 빛깔, 어엿한 모습. 단풍의 고장, 내장산 기슭에 번져가는 단풍 빛에 온몸을 던져 뛰고 또 뛴다. 뛰다가 보니 정읍사 공원이 있고, 거기에 망부석 여인이 서있다.


단풍아 붉게 물들어서

온 산을 불태워라.


내 님 계신 곳까지

곱게, 곱게 물들여라.

(2007.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