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29. 16:18ㆍSUL
[문화재청 홈페이지 / http://www.cha.go.kr]진도홍주는 고려 때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왔다는 소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삼별초를 토벌하러 온 몽고인들이 홍주(紅酒) 내리는 비법을 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을 하지만, 재료로 쓰이는 지초(芝草)는 황폐한 몽고 땅에서 재배가 힘들기 때문에 생약(生藥)을 활용한 홍주를 전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후기 이후 우리 선인들은 어느 지방에서나 한주, 백주라 하여 소주를 제조하여 마셔왔다. 원래 소주는 조정에서만 사용하였으나 차츰 서민층에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소주에 약제를 가미하는 지혜가 생겼고, 약소주 또는 한소주로 발전되어 지방마다 특색 있는 유명한 술을 낳게 된 것이다. 진도홍주 역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져 토속 명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드는 과정은 누룩의 제조, 담금 및 발효, 증류의 3단계이다. 홍주는 소화를 도와 식욕을 왕성하게 하고, 알콜 40% 이상의 도수가 높은 술인데 목 안에 큰 자극을 주지 않고 적은 양으로도 취기를 느끼게 하며 숙취가 없고 칵테일을 할 수 있는 효능과 특징이 있다.
진도홍주는 해방 전까지는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 일반적으로 제조되어 왔으나 이후 주류단속이 심하자, 부자 집보다는 생활이 어려운 부녀자들이 생계수단으로 은밀히 제조하여 그 비법이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1993년 창립한 진도전통홍주보존회에서 보존, 개발, 산업화하고 있으며, 기능보유자 허화자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 홍주에 얽힌 야사
1.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던 함경도 병마절도사 허종(許綜)에게는 청주한 씨 성을 가진 현명한 부인이 있었다. 그 한씨 부인은 홍주의 비법을 알고 있어 그 비법을 후손들에게 전하였다. 9대 성종 때에 윤비(尹妃)를 폐출하려 할 때 어전회의가 있었는데 부인 한씨는 후에 윤비 폐출로 인해 남편에게 분명 화가 미칠 것을 알고 그날 아침 허종에게 홍주를 마시게 해, 허종이 어전회의를 가던 중 말에서 떨어져 다시 집으로 실어오게 만들었다. 그 후 윤비 소생인 연산군에 의해 벌어진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허종은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면해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2.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될 때 부인 허씨(허명의 딸)가 친정조카인 허대에게 고숙을 보살피도록 부탁해 허대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고조리(소주를 내리는 기구)를 가지고 진도에 와 정착한 뒤 홍주비법을 전수했다는 이야기다.
3.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조선후기의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이 진도홍주의 붉은 빛을 두고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 할 때 풍경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전국 각지의 전통주를 즐겼던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며 진도홍주를 함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1-3 진도홍주 홈페이지 http://hongju.jindo.go.kr]
4. 1992년인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주지회에서 있었던 일. 지회 살림에 보태 쓰려고 지회사무실에서 몇몇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고, 진도 홍주도 있었다. 당시에 전교조해직교사원상회복추진위원회가 활동 중이었고, 충일중학교에 근무하던 이경철 교사[음악]가 추진위 활동과 관련, 영동 상촌중학교로 쫓겨 가는 일이 벌어졌었다. 송별회 때 홍주를 나눠 마셨다. 술을 거의 못하는 박종순 충북추진위원장 이빨이 부러지는 등 음주 후유증으로 한바탕 소동이, 밤새, 조용히, 있었다. 그 뒤, 한두 차례, 홍주를 마실 때마다 뒷이야기 무성한 일들이 어김없이 일어났고, 조촐하게 적었던 조합원들 사이에서 홍주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다시 몇 년 후, 그들 중 하나였던 나그네가 진도 여행을 할 때, 다시 홍주에 얻어맞았다. 나그네는 홍주의 별난 의미를 되새기면서 객지의 아침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