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4. 21:01ㆍ충청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맞는 것
마른 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서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가을의 소원/안도현
절기상으로 입동이 지났지만,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찬 기운이 돌지만, 불그죽죽한 단풍의 자취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아직은 가을이다.
요즘, 어수선한 마음이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는다. 난장판 국회에서 파행 처리된 미디어법에 대하여, "절차는 위법이지만, 법안은 유효하다."는 헌법재판소. 생존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법보다 가까운 주먹'을 휘두르고도 멀쩡한 경찰, 그렇게 변을 당한 사람들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우는 법원. 4대강 사업이 그렇고, 세종시 문제가 그렇고, 교육정책이 그렇고, 대통령과 정부가 밀어붙이는 모든 정책이 다 그렇다. 꼭두각시들끼리만 소통하는 세상, 꼭두각시들이 하는 말과 행동만이 정당하다고 하는 세상, '영혼이 없는' 꼭두각시들이 패를 잡고 판을 치는 세상이다. 꼭두각시들의 얼굴엔,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그럴 듯한 말로 이해를 시키면 된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착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럴 땐 무력감에서 헤어나기가 어렵다. 그냥 게으름이나 누려야 하나?
이러고 보면 오늘 걸음에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어수선한 생각들을 날려 보낼까 하고 나선 셈이다. 그냥 걷는 것도 아니다.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려 펼쳐지는 절경에 넋을 홀랑 빼앗기면서 걷다가 서다가 한다. 여기저기 솟아 있는 바위봉우리에 소나무가 날아갈 듯 박혀 있다. 바위 벼랑 허리에도 소나무다. 푸른 소나무를 안고, 이고 있는 허연 바위가 사방에 널려 있다. 하봉, 중봉, 영봉, 덕주봉, 만수봉, 용암봉과 세자매봉, 버섯능선, 저 건너 북바위산과 용마봉까지. 월악산의 참모습을 통째로 바라볼 수 있는 곳, 소나무 몇 그루가 옆에 서 있고 조망이 좋은, 닷돈재 바위 바닥에 앉아 이 모든 봉우리와 바위와 소나무들을 바라본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술상이 어디 있으랴.
* 2009년 11월 14일. 아침 일찍부터 김장거리 심부름을 마치고, 닷돈재를 다녀오다. 잔뜩 흐려 있던 날씨가 닷돈재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벗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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