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14. 23:33ㆍ자드락
2012년 4월 14일 토요일.
봄은 주말 동안에 푹푹 익어 가는가. 주말에야 한낮 바깥 날씨에 푹 빠져볼 수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 결혼식장에 다녀오면서 오후 일정을 바꾸었다. 제천청풍호 자드락길로 가자, 7코스를 가보자. 자드락길은 1코스에서 7코스까지 있다. 엊그제 11일, 투표를 마치고 도보사랑 도반들과 어울려 6코스[괴곡리에서 지곡리까지]를 걸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제천자드락길을 처음 걸어본 것이다. 6코스가 끝나는 지곡리에서 시작되는 7코스는 도전리를 거쳐 서곡리 - 육판재 - 율지리말목장, 다시 도전리까지다. 6코스는 괴곡성벽길, 7코스는 약초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도전리에는 청풍김씨 시조묘가 있다. 육판재는 예전에 육조판서가 청풍김씨 시조 김대유의 묘를 찾으려고 넘었던 고개라고 하며, 상방곡과 하방곡 마을 이름에 꽃다울 방(芳) 자가 들어 있는 것은 강 건너 도화동[청풍면 도화리]에서 복사꽃이 날아와 앉은 도화낙지혈(桃花落地穴) 명당이 있어서란다. 서곡리는 지형이 호미 모양으로 생겨서 호무실 또는 서곡(鋤谷)이라고 마을 앞 안내판에 적혀 있다. 도전리에 있는 좀 오래 된 듯한 이정표에는 호미실이라고 되어 있다. 지난번에 이어 또 생각하는 것, 곡[실]자가 들어 있는 지명들이 참 많다. 괴곡[괴실], 전곡[앞실], 금곡[쇠실], 지곡[늪실], 서곡[호미실], 구곡[구실], 적곡 등. 느티나무가 많아서, 늪이 있어서, 앞에 골짜기가 있다고 해서, 예전에 쇠를 많이 캤다고 해서, 호미같이 생겼다고, 골짜기가 아홉이라서, ‥‥‥‥. 청천 쪽에선 ‘평’ 자를 많이 보았었는데, 재미있다.
호미실 마을 뒤를 돌아올라 가며 고갯마루에 서 있는 이정표를 바라다본다. 이정표 대신 느티나무 한 그루 있었으면 하는 생각 끝에 올라서니 청풍호[남한강]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기가 청풍, 저기가 엊그제 거기 옥순대교, ‥‥‥‥, 거기가 거기다. 그러고 보니 30여 년 전, 이 근방을 처음 왔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1980년 1월이었다. 충주댐 물이 차오르기 전, 수몰 예정 지역 마을들을 찾아다니던 일. 그 때, 녹음기를 들고서 다녔었던 마을 이름들이 생각난다. 서창, 덕곡, 밤나무골, 돈리, 물태리, 실리곡리, 단리, 읍리, 강 건너 교리, 도화리 등등. 민요와 민담과 전설 등 사라져 가는 것들을 찾아, 물속에 잠기기 전에 기록해 두는 일을 했었다. 어사 박문수가 밥 위에 뉘가 셋 얹혀 있는 것을 보고 반찬으로 나온 생선을 네 토막 내어, 밥상을 들고 온 처자에게 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마 단리에서였을 거다.[뉘시오? 어사요.]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야기의 무대가 그 마을이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머리에 곡식 자루를 이고 가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던 고갯길은 저쪽에 있는 오티재가 분명하다. 10여 년 전, 충주에서 만나 알게 된 어떤 사람이 그때 밤나무골에서 만났던 박수무당의 친조카라는 사실을 알고, 세상 참 좁다느니 어쩌니 한 적도 있다. 실리곡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무속인은 끝내 만나질 못했었다. 읍내리에 있던 한벽루에서 시조창 소리를 들었었던가? 저쪽 강 건너 도화리에선 처마에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구멍가게에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주로 옛 사당패들 이야기였다. 옛날 관습으로 그들은 어디를 가든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 뒤 바위벼랑 아래 터를 잡곤 했었다고 하면서 현장으로 안내를 하였었다. 기억 속의 옛 마을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길, 마을과 마을로 이어지고,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고, 고개 너머로 이어지는 길. 참으로 좋다.
자드락길. 말 그대로 낮은 산기슭, 낮은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길. 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걸 보며 걷는 길, 나무처럼 숲처럼 산속에 안겨 있는 마을들을 만나는 길, 지나는 마을마다 그윽한 옛 사연이 듬뿍듬뿍 배어나는 것 같아 심심하지 않은 길, 구부러지고 오르내리며 조붓하게 이어지는 길, 뭔지 모르게 정겹고 마음 편하게 다가오는 고갯마루가 있는 길, 옛 사람들 이야기 소리가 두런두런 정겹게 들리는 것 같은 길, 아련하게 향수를 자아올리는 길, 적당하게 운동이 되고 기분 좋게 땀 흘릴 수 있는 길, 온몸과 온 마음을 씻어주는 맑은 공기가 가득한 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이 오나 가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따갑거나 그냥 그렇게 있을 길, 좋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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