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8. 21:30ㆍ선비순례길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울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종택 앞에 다시 왔다. 이육사문학관 쪽으로 간다.
토계천을 건너 자동차도로를 따라 걷는다. 길은 토계천을 따라 구불거린다. 고목에 섞여 고색을 풍기는 당집이 주는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서 '퇴계 선생 묘소' 이정표를 만난다.
비탈진 산길 170m를 한달음에 올라선다. 무덤 앞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쓴 것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두 사람 은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서로를 아꼈다고 한다. 나이는 기대승이 26년 아래이다.
퇴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산과 더불어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하며, 조선 성리학의 큰 기둥, 영남 유학의 거두, '고매한 인품과 겸양' 등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 50m 쯤 아래에 선생의 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가 있다. '죽어서라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다'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묘소 아래에 수졸당과 재사가 있다. 하계 마을이다. 수졸당은 퇴계의 손자 동암 이영도의 살림집이었고, 재사는 말 그대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집이다.
동암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현 위치에서 100여m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고택 앞에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병 활동을 기리는 비와 아주 작은 공원이 있다. 2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하계 마을은 의병과 항일 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왕성했던 곳이라고 한다.
수졸당에서 한 모퉁이를 돌면서 자동차도로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길지 않은 산길에 호젓함이 듬뿍 배어 있다.
윶판대. 너럭바위에 윷판이 그려져 있어서 윷판대란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던 곳이라고 한다.
굽이치는 낙동강 줄기와 마을을 거느린 너른 강변, 먼 물줄기 건너편 멋들어진 바위벼랑과 너울지는 산봉우리들, 멀어져가는 하늘. 그림같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에서 내려온 길은 자동차도로 옆 나무 데크로 이어진다. 원촌 마을이다. 이육사문학관이 있고, 청포도 시비 공원이 있고, 고택들이 있다. 이육사 고향 마을이란다.
문학관을 한 바퀴 비~잉 둘러본다. 시집 한 권, 산문집 한 권을 사 들고 나오면서 문학관 옆 육우당(六友堂)에 눈길을 던진다. 육사 여섯 형제들의 우애를 생각하면서. 모두가 항일 의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배경 인물로 알려진 허형식을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 육사의 외당숙이라고 한다.
더불어, 왕산 허위 가문을 생각한다.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가문. 허형식은 왕산 허위의 5촌 조카라고 한다.
이상룡, 이동녕 등 식민지 시대에 일가를 이끌고 남의 땅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뒤를 잇는다. 독립의 꿈을 놓지 않고 나라 안팎을 떠돌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고난에 찬 삶을 헤아려 본다. 밤하늘의 별처럼 스러져간 숱한 영혼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시대인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들의 삶 속에 흐르던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선비 정신이 아니었을까.
원촌 마을 앞, 강변이 무척 넓다. 가을걷이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는 콩밭이 보이고, 기다란 시래기 건조대가 보이고, 넓고 넓은 마른 풀밭이 보인다.
강변을 헤집고, 강변 마을들을 지나고, 오늘의 목적지 단천교 다리 위에서 낙동강 상류 맑은 물을 바라본다.
길을 되짚는다. 오던 길과 다른 갈래로 들어서기도 하면서 여유를 부린다. 총 12.91Km.
포도밭이 많이 보인다. 그렇구나. 육사의 시 '청포도'.
퇴계종택에서 도산면 소재지 온혜 마을로 이어지는 길가에 '264청포도와인' 간판이 있다. 어이 외면하리. 시음도 살짝하고, 세 병 든 상자 하나를 집어 든다. 흐뭇하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빛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손은 흠뻑 적셔도 좋으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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