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17. 22:50ㆍ선비순례길
중국 원나라 말기에 농민들과 백련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리를 '홍건적의 난'이라고 한다. 가혹한 세금과 부역, 잦은 물난리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난을 일으켰다고 하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이 난리에 참여한 여러 장수 중 하나였다고 한다.
홍건적은 이웃 나라 고려에까지 밀려들었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그때, 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성을 쌓고 머물렀었기에 '왕모산'이라고 한다. 왕의 어머니가 난을 피난한 산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길이가 50여m쯤 된다는 산성의 흔적은 360m가 넘는다고 한다. 성안에 왕모당이 있다. 공민왕이, 어머니가 피난한 곳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2023년 10월 17일 화요일. 볕은 맑고, 바람은 선선하다. 왕모산을 걷는다. 왕모산성 관리소-왕모당-갈선대-산마루(648)-한골 입구-길선대-왕모당-처음 거기. 6.68Km.
산성 관리소에 사람은 없고, 마당 가에 등산 안내도가 있다. 길은 곧바로 숲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익어가는 가을, 햇볕도 바람결도 익어간다. 산빛도 하늘빛도 익어간다. 나그네 얼굴도 가슴도 익는다.
구절초 하얀 얼굴이 여기에서 저기에서 반갑다. 팥알만 한 빨간 열매를 여럿 달고 있는 저 나무 이름은 무엇일까. 개암나무처럼 보이지만 열매로 보아 아닌 것이 확실하다. 무엇일까.
갈선대 위에 올라 둘러본다. 저 위에서 저 아래로 굽이굽이 아스라한 물줄기 이름은 낙동강이다. 봉화 쪽에서 흘러와 안동 시내 쪽으로 구불거리는 물줄기. 저기쯤에서 청량산 아래를 스치고, 여기 왕모산 아래를 휘돌아 예안 쪽으로, 안동 쪽으로 구불거리면서 크고 작은 산을 거느리고, 크고 작은 들을 일구면서 온갖 생명을 기르는 물줄기. 저기에서, 또 저기에서, 호수를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된 것은 안동댐이 생긴 후의 일이겠지.
물 건너에 너른 강변이 있고, 그 끝 산자락에 원촌 마을이 안겨 있다. 원촌은 육사 이원록의 고향 마을이고, 마을 어귀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저쪽 저 동산은 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다듬던 곳이라고 하는 윷판대이고, 여기 갈선대는 육사가 '절정'의 시상을 다듬던 곳이라고 한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릅을 끓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윷판대 너머에 '퇴계선생묘소'가 있고, 토계천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퇴계종택'이 있고, 종택 뒤편 야트막한 산등성이 너머에 도산서원이 있다. 그러니까 여기는 퇴계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는 고장인 것이다. 저쪽에서 저쪽으로, 청량산을 오가는 퇴계의 그림자를 찾아보자. 퇴계는 청량산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한다.
육사, 퇴계 뿐이랴. 예안 선비들을 생각한다. 저쪽 마을에 우글우글했었다는 독립투사들을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땅에서 희비애환에 울고 웃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숱한 영혼들,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나를 들여다본다.
그리 높지 않은 산, 길지 않은 길이 좀 가파른 편이다. 서둘지 않는 걸음에 적당히 땀이 흐른다. 산마루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저 멀리 위쪽에서 저 멀리 아래쪽으로, 길게 구불거리는 낙동강 줄기를 또 따라가 본다. 원촌 마을을 바라보고, 이육사의 삶을 들여다 본다. 청량산을 찾아가는 퇴계의 모습과 그 길을 바라본다. 볕은 맑고, 바람은 선선하다. 슬슬 내려가 볼까. 이쪽은 길은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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