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8. 23:53ㆍ선비순례길
2023년 11월 8일 수요일. 안동시 도산면행정복지센터 앞에서 도산면 원천리 원천교까지 택시를 타다. 요금 13,000원. 다리 위에서 칼선대 멋진 풍경을 잠깐 쳐다보고 나서 걸음을 뗀다.
내살미 마을 강변에 무밭이 퍼렇다. 온통 단무지용 무밭이다. 강가로 이어지는 길가에 월란정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가파른 산길 230m.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가을이 깊어진 것인가, 겨울이 시작되는 것인가.산 공기가 상큼하다.
월란정사: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였고, 농암 이현보 등과 어울려 시문을 읊던 월란암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1860년, 가장 늦게까지 월란암에 머물렀던 김사원의 후손들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낡은 채로 문이 잠겼고, 풀밭이 된, 손바닥만 한 바깥 마당 가에 '月瀾庵七臺紀蹟碑'가 있다. 발밑에서부터 멀리까지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바다처럼 넓은 안동호 물빛과 산빛과 훤한 하늘빛, 거기에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는 어떤 기운.
한 십 리쯤 왔을까. 골짜기 초입에서 길이 끊어지고, 강으로 흘러드는 개울가에 외딴집 두 채가 나타난다. 아무리 둘러보고 살펴봐도, 있어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도 없다.
한쪽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인기척이 있다. 꼬부랑 할머니께서 개울 건너 쪽을 가리키시면서 작대기를 하나 가져가라고 하신다. 가만가만 길 흔적을 살피면서 산속을 헤매고 헤맨 끝에 번남고택에 이르다. 의촌 마을이다.
번남고택: 퇴계의 9세손이 1810년 무렵에 안채를 지었고, 그 아들이 1857년에 북쪽 사랑채 번남정사를 지었으며, 남쪽 사랑채 삼호당은 1870년 즈음에 지었다고 한다. 전체 모습이 成 자 모양을 이룬다고 한다. 처음에 99칸이었고, 지금은 70여 칸만 남았다고 한다. 고택 앞 길가에 참나무 고목 두어 그루가 한껏 멋을 부린다.
번남고택 이웃에 거의 버려진 듯 보이는 고택이 두엇 더 보인다. 길도 살필 겸 다가가 본다. 낡은 모습이다. 이리저리 둘러본다. 마을을 벗어나 물가로 이어지는 길은 저만치에서 끝인 듯하다. 아마도 물가 산기슭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겠지. 아까 내가 헤매던 길을 만날 수도 있겠지. 되돌아서서 갈 길을 간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순례길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마주 오는 노인께 길을 묻는다. 부포리 쪽으로 가다보면 계상고택 이정표가 있다고 하신다.
공사 중인 도로를 따라 걷는다. 사과발이 보인다. 빨간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사과나무 모양이 특이하다. 높지 않은 키에 짧은 가지마다 주먹 크기의 사과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신품종인가, 신기술인가. 고갯마루에 오르니 과연 이정표가 서 있다.
부포리 3Km 계상고택 2.1Km. 그럼? 하면서 계상고택 쪽으로 길을 잡는다. 고택 앞에 가서 보니 친절한 이정표가 나타난다. 맞다. 의촌 마을에서 이쪽으로 오는 순례길이 있다는 얘기다. 허허 참.
무슨 무슨 둘레길을 걸을 때 흔히 겪는 일이고, 준비가 꼼꼼하지 못한 것도 반복되는 일이다. 대충 할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대충 하고야 마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 이런 어리석음을 즐기는 건 아닐까. 둘레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을 것도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계상고택: 역동 우탁을 배향했던 역동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계상 이만응은 1895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맞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인물로 퇴계의 11대손이며, 영남만인소의 소두였던 이만손이 그의 동생이라고 한다. 계상고택은 1975년 안동댐 건설 후 수몰된 부포리에서 유일하게 남은 고택이라고 한다.
왕복 4.2Km. 아까 그 고갯마루에 다시 와서 부포리 쪽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선다. 공사 구간이 끝나고, 아스팔트길 두 번째 내리막 끝,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는 길가에 성성재종택이 있다.
성성재종택: 성성재 금난수 가문의 종택이다. 금난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고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예안 출신 선비였고, 종택은 18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성성재종택을 지난 오르막 끝에서부터 부포리선착장까지는 구불구불 내리막길이다. 전망 쉼터도 있고, 애국지사 기념 공원도 있고,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진다.아, 저 건너 저기 저것이 월천서당 아닌가.
전화로 여객선을 부른다. 마주보이는 건너편에서 배가 이리로 온다. 아, 이 한 사람을 위해 자동차도 실어나르는 저 큰 배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요금 300원. 짧은 거리이지만 이건 뱃놀이가 아닌가.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 떠서 사방에서 익어가는 가을빛을 만끽한다.
배에서 내리자 바로 월천서당이다. 순례길 1코스가 끝나고 2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서당 앞 고목 은행나무에 노란 보석들이 반쯤 남아 있다. 서당 건물과 뒷산과 하늘과 노란 잎을 적당히 달고 있는 은행나무 고목. 좋다.
원천교-내살미-월란정사-번남고택-계상고택-성성재종택-부포리선착장. 14.79Km.(월천서당에서 도산면행정복지센터까지 택시 요금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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