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산딸기가 익어가는 시절[문수봉]

2008. 2. 27. 09:33충청

잎새 뒤에 숨어 숨어 익은 산딸기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았습니다.

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갑니다.


잎새 뒤에 몰래 몰래 익은 산딸기

귀엽고도 탐스러운 그 산딸기를

차마 차마 못 따 가고 그냥 갑니다.

                   ―  산딸기 / 강소천 작사 정세문 작곡


6월은 산딸기가 익어가는 시절이다. 먼저 덩굴딸기가 익고, 다음에는 나무딸기, 그다음에는 멍석딸기, 그 다음 7월 중순 쯤 되면 까맣게 익는 복분자. 문수산 오르는 길에 산딸기가 지천이다. 동요에선 망설이다 그냥 가고, 차마 못 따 먹고 그냥 간다고 했는데, 오늘 이 산을 찾은 나그네는 마음껏 따 먹는다. 2006년 6월 24일. 토요일이다.


사람이나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딸기들을 만나면 ‘귀엽고 탐스러워서’가 아니라 먼지라도 앉았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고, 입에서도 바라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자동차 소리는 물론 사람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깊은 골짜기다. 오히려 신비스런 산의 정기라도 스며 있을 것 같다. 딸기들도 굳이 숨으려고 하지 않고, 빨갛게 여기 저기, 옹기종기 모여서 널려 있다. 아무것도 온전한 그대로를 위협하는 게 없으니 굳이 숨을 필요가 있으랴. 그래 이것저것 고를 필요도 없고 이리저리 찾아다닐 일도 없이, 길을 가면서 손에 닿는 대로 따서 입에 넣는다.


산딸기는 한 손바닥씩 입에 털어 넣어야 제대로 맛을 볼 수가 있다. 새큼하다? 달콤하다? 아니, 적절한 말을 모르겠다. 어떠한 과학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할 산딸기의 맛. 그것은 그렇게 한 입 가득 넣고 지그시 압력을 가하며 먹어야 느낄 수 있다. 그 즙이 입안에 흥건히 괴이도록‥‥‥.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 옆 골짜기에 있다. 상선암에서 59번 국도를 따라 문경을 향하다가 문수봉 쪽으로 길게 들어가는 골짜기를 ‘명전계곡’이라 하고 내를 따라 여기저기 흩어지고 모여 있는 마을들을 합하여 ‘명전리’라고 한다. 밭[田]에서 새가 우는[鳴] 소리가 난다고. 골짜기 끝에 있는, 서너 집이 이웃해 있는 마을 이름은 ‘건학(乾鶴)’. 주위 산세가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을 하고 있대서 붙은 이름인데 주민들은 보통 ‘거느기’라고 부른단다.


거느기 마을 문수봉 등산로 입구에서 ‘사람’을 만났다. 산이 좋고 공기가 좋아 몇 해 전에 빈집을 하나 얻어 요양 삼아 머물고 있단다. 주고받는 몇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무엇을 얘기하는 기분으로 벚나무 까만 열매를 함께 따먹는다. “올라가 보겠습니다.” 작별 인사 남기고 산으로 들어서니, 뚱딴지 군락이 펼쳐지고, 개망초꽃이 달밤 메밀꽃처럼 묵정밭 가득 하얗다. 길은 그렇게 숲 속으로 들어간다. 땡볕이 종일토록 내리 쬐지만 숲 속은 서늘하고 바람이 줄기줄기 시원하다. 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실비단 산허리는 계곡으로, 능선으로 펼쳐진다. 깨끗하고 곱고 준수하다.


문수봉(文繡峰)은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과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사이에 있다. 대미산에서 황장산을 지나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메두막봉이 보이는데 그 뒤가 하설산이다. 그러니까 문수봉, 메두막봉, 하설산은 백두대간 대미산에서 월악산 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 위에 있는 봉우리들이다. 모두가 해발 1,000 미터가 넘는다. 그리고 산 밑 덕산면 도기리 양주동 일대 기슭은 여러 종류의 약초가 자라고 있는 제천약초 주산지이다. 다시 반대편 저쪽에는 바위산 도락산이 있고, 산 아래 단양천이 흐르는 계곡엔 단양팔경으로 꼽히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이 절경 속에 묻혀 있다. ‘문수산(文殊山)’ 이름을 가진 산이 곳곳에 있지만, 여기는 문수봉(文繡峰)이다. 지혜의 화신이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생각하다가 비단결 같이 펼쳐 있는 산허리를 따라 사방을 둘러본다.


꽤 이름이 있는 산인데도 오늘은 독차지다. 휘적휘적, 쉬엄쉬엄, 풍욕도 하고, 바위에 앉아 눈도 감아보고, 여름 산을 만끽하고 내려오다가 온몸을 수정같이 맑은 물에 푹 담근다. 머루랑 다래랑 뿐 아니라 산딸기랑 벚이랑도 있는 청산(靑山). 맑고 깨끗한 바람이 노닐고, 골짜기엔 온갖 신비를 머금은 물이 흐르고, 의연한 자태 고운 빛으로 사시사철 사람을 받아 품어 주니, “청산에 살어리랏다.”

(200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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