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맞으러[소백산]

2008. 2. 27. 09:46충청

아 ! 이 바람을 맞으러 왔다.

이미 쌓인 눈까지 가루로 만들어 험악하게 흩뿌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발을 이리저리 몰아붙이면서 씽씽 울어대던 바람. 처음에는 얼굴을 빨갛게, 다음에는 코끝을 하얗게 얼려버리던 바람. 걸음도 떼지 못하게, 몸조차 가누지 못하게 하던 소백산 칼바람. 지금은 죽죽 드러누우면서 온몸을 흔들어대는 풀밭 위로 불어오고 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를 꾸역꾸역 밀어 올리면서 쉬지 않고 불어댄다.


2006년 7월 9일 일요일. 홍진(紅塵)을 털어보자? 소백산이 좋겠다. 태풍이 비를 몰고 온다고는 하나 이쪽 지방까지 오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집을 나섰다. 장마 사이로, 태풍 사이로.


이렇게 숨을 쉬기 위해서 왔다.

다리안계곡에 들어서니 물소리가 온몸을 적셔온다. 느긋느긋 걸으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쉰다. 들이쉬는 공기로 내장을 씻는다. 실핏줄 가닥 하나하나까지 씻어낸다. 그윽한 정기를 품은 산의 숨결이 몸 속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청소를 한다. 속에 여기저기 엉겨 있던 티끌들이 씻겨 떨어져 나간다.


“흐~음, 후~!”


날씨 탓인지 사람들이 뜸하다. 그럼, 이게 좋지. 행운이다. 안 그러면 북새통으로 깊은 맛을 느끼기가 어려웠을 건데 이 얼마나 호젓하고 여유로운가.


이 맛을 보러 왔다.

그리운 바람이 있는 봉우리. 짙은 안개를 뚫고 올라선 비로봉에도 엷은 안개가 서려 있고, 바람은 자꾸만 안개인지 구름인지를 실어 나르고 있다. 우선 맥주 캔을 딴다. 캬~! 저 밑 속세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이 맛!


송편을 맛있게 먹는 법 : 1. 참기름 바른 송편으로 도시락을 싼다. 2. 도시락, 물, 캔맥주를 배낭에 넣고, 다리안계곡 입구에서 소백산 비로봉을 향하여 걷는다. 3. 중간에 배가 고프면 배낭 속에 있는 송편을 생각하면서 물을 마시고 계속 걷는다. 4. 비로봉에 도착하면 사방을 둘러보며 한참 동안 감탄에 잠긴다. 5. 계속 감탄을 하면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6. 맥주를 마시고 나서 “캬~!” 한다. 7. 송편을 먹는다. 끝.


비로봉(毘盧峯) 표지석 뒷면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 서리서리 백리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 라는 서거정의 한시(漢詩)가 적혀 있다. 번역해 놓은 말들이 좀 어색하다 싶어 눈 비비고 들여다보다가, 몰려드는 구름안개 속 ‘서리서리’ 뻗혀 있는 산줄기와 계곡을 짐작해 본다. 북쪽으로는 국망봉-고치령-선달산으로, 남쪽으로는 연화봉-죽령-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백두대간이다. 그리고 저 아래 안개구름 밑에는 비로사로 해서 삼가리로 이어지는 길과 초암사를 거쳐 배점으로 빠지는 길이 있고, 제1연화봉과 제2연화봉 사이에서 풍기 쪽으로 빠지다 보면 희방사가 있고 희방폭포가 있다. 저쪽으로 가면 어의곡으로 가는 길이 있다. 내가 올라온 길은 단양 쪽 다리안계곡이다.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팔뚝에 하얀 안개꽃이 맺히고 안개 속에는 슬쩍슬쩍 이슬비가 섞인다.  슬슬 춥기도 하고, 태풍이 올라오고, 비가 온다고도 했으니 아쉽지만 내려가야겠다. 중간쯤에 있는 휴게소에서 컵라면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일어서는데 기어코 빗줄기가 잦아진다.


투두둑 투두둑 다리안계곡에 비가 내린다.

타박타박 나그네 걸음이 장단을 이룬다.

콸콸콸 구렁에 물보라가 흥을 돕는다.


소백산 바람에 몸을 씻고,

푸른 숲 숨결 받아 내장을 씻고,

맥주 한 깡통에 홍진을 비우고.


비 맞은 몸, 비 맞은 숲 벽계수로 흐른다.

(200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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