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10:02ㆍ충청
추적추적 초가을 비.
뚜벅뚜벅 나그네 걸음.
요 며칠 좀 심란하다. 가을인가? 비가 좀 뿌리는 아침, 망설이다가 길을 나선다. 송계마을에서 비옷을 입는다. 길이 나무숲으로 빨려 들어가는 곳에서 비옷을 벗는다. 자박자박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이리저리 산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소리에 실려와 몸을 때리는 어린 빗방울들. 아! 이렇게 나선 게 얼마나 잘한 일인가.
주능선 갈림길. 다음 주에 미사모가 월악산을 찾는다고 했으니 영봉으로 가긴 그렇고, 반대 방향으로 간다. ‘월악산님, 다음 주엔 좀 시끄러울 겁니다.’ 헬기장을 지나 960 고지. 버섯 능선으로 가는 길이 길게 자란 풀 섶에 은밀하면서도 또렷하지만, 그 길도 아니다. 아무 욕심 없이, 느긋느긋,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바위 벼랑이 언뜻 보이더니 만수봉, 덕주봉 쪽 산허리가 고운 모습으로 쫙 펼쳐진다. ‘그래, 이 거야! ‥‥‥.’
삶은 감자 껍질을 벗긴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김밥이나 주먹밥보다 훨씬 간편하면서도 멋있는 이 맛! 얼마 전 가리왕산에서 터득한 것이다.
마애불 옆에 멋들어진 기와집 한 채가 만들어지고 있다. 촛불을 켜는 이,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이, 빗물을 조심하면서 사진기를 꺼내는 이, 좋은 경치에 어울리도록 폼을 잡는 이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눈길은 하늘 속 저쪽으로 뻗어간다. 옆에서 누가 말한다. 미륵리에 있는 부처님 눈길과 만나는 것이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느새 덕주골이다. 길가 식당에 단체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음식 자체보다는 분위기에서 우러나는 맛이 느껴져 흐뭇하다.
이제는 포장된 도로, 다시 비옷을 입는다. 자동차가 가끔 지나간다. 가을로 들어서는 개울물이 맑디맑고, 김장 배추가 자라고 있는 밭둑엔 늙은 호박들이 뒹굴고 있다.
참으로 운이 좋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떠올린다. 오늘도, 비 때문에 망설이다가 나선 길에서 얼마나 많은 걸 누렸는가? 알맞게 내려주는 비, 알맞게 불어 주는 바람, 마음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길,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의 빛깔, ‥‥‥.
(200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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