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09:47ㆍ충청
2006년도 여름. 7월 22일. 엊그제까지 쏟아진 장맛비로 온 나라가 물난리다. 강원도가 짓밟혔고, 중부지방, 남부지방 곳곳이 물에 잠기고, 길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고, 마을들이 산사태에 묻혔다. 이레 만에 해님이 얼굴을 내민다. 8월 말로 정년(停年)을 맞는 분과 함께 문경새재를 걷는다.
꽤 여러 번 와 보지만 산과 숲과 공기는 늘 새롭다. 조선 태종 때 개척 되었고, 영남 선비들의 한양 나들이, 특히 과거 길 얘기가 무성하고, 보부상들이 오르내렸으며, 이런 저런 일들로 넘나드는 길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대로(大路) 상의 고개. 그래서 숱한 사연이 곳곳에 배여 있는 고개. 옛 자취를 더듬어 무슨 향기라도 맡아볼까? 상쾌한 산 속을 걸어보자고 찾아드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고사리에서 계곡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본 길로 올라서서 3관문을 지나 고개를 넘는다. 약수 한 바가지에 속이 시원하다. 한 청년이 다가와 마역봉(마패봉) 가는 길을 묻는다. 한 눈에 보니 백두대간을 걷는 차림이다. 여유 있게 설명을 해 준다. 마역봉-부봉-월항삼봉-하늘재-포암산 ‥‥‥.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몸이 그 능선을 타고 있는 듯하다.
좀 내려오니 동화원(桐華院)이다. 오백여 년 전 밀양박씨가 정착하였고, 민가 30여 호에 5~6호의 객주와 원(院)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원(院)은 원래 30 리 간격으로 있었으나, 이곳 새재는 고개가 험하고 산적들의 횡포가 심해서 10 리마다 원을 두었다고 한다. 조령원-동화원-신혜원.
동화원!
옛 원(院)이 있던 산골 오지 마을이다. 옛날에 이 마을에 분교(分校)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이 마을 분교에 2학년 한 명, 5학년 한 명이 다니고 있었을 때, 그 교실 마루바닥에서 장맛비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그리고 십년 쯤 지난 후,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 운동에 가담했다가 충주여자중학교에서 쫓겨나던 날, 89년에 해직 된 선생님들 몇 분과 함께 이곳에 와서 잔을 기울였다. 어느 해 여름엔 주막에 딸린 저 위쪽 물가 원두막에 앉아 장맛비 가락을 들으면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셨다.
그렇게 동화원을 찾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그리고 지금 온 나라가 물난리로 정신이 없는 이 때. 정년을 맞아 교단을 떠나는 분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내 머리 속에는 무슨 생각들이 놀고 있는가. 다시 찾은 동화원에서, 막걸리를 딱 한 잔씩 하고 2관문을 향해 걷는다.
길가에 한시와 그 번역문을 새겨 놓은 돌들이 보인다. 옛날 이 길을 찾았던 사람들이 지어낸 것들을 최근에 그렇게 해 논 것이다. 이황, 서거정, 김성일, 이언적, 김만중, 김시습, 이이, 유성룡, 정약용, ‥‥‥. 쟁쟁한 이름들이다. 조선시대에 이 고갯길, 새재[鳥嶺]가 차지했던 비중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겠다.
“돌길을 지나 구름 위로 올라서니 / 굽이굽이 휘도는 새재 길 삼 십리 / ‥‥‥.”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오네. /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 ‥‥‥.”
“‥‥‥ / 지혜와 어리석음 무슨 차이 있으랴. / 아직은 견마 잡힐 신세 아니어서 / 산과 계곡이 반겨주는 것이리라.”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 차가운 바람은 숲 속을 흔드는데 / 길손은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 ‥‥‥.”
‥‥‥.
더 걷다 보니, ‘새재우[-雨]’ 전설을 가지고 있는 바위굴이 나타난다. 옛날에 어떤 선비가 소낙비를 피해 바위굴에 들어왔다가 과년한 처녀를 만나 인연을 맺고 헤어졌단다. 후에 처녀가 아이를 낳아 10여 년이 지나니 주위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린다. 어머니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던 중, 어느 산골 주막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하더란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무슨 뜻입니까?” 하니,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하더란다. 아버지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던가? 부자지간임을 확인하고 함께 돌아와 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살았단다. 그런 전설이 있어 지금도 청춘남녀들이 많이 찾는다고?
2관문을 지나 내려오다가 널찍한 바위에 한참을 앉았다 간다. 길에서 20 미터 남짓 떨어진 곳인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풀 섶 사이로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하다.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앉아 산과 허공을 감상하노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일행들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되지. 아쉬움을 털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윗녘 아랫녘 물난리 소식은 그침이 없고, 햇빛 비치는 1관문 앞길에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상가 앞 주차장에는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심심찮게 드나든다. 삶이란 무엇이고 길이란 무엇인가?
(200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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