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7. 10:06ㆍ충청
“예전엔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지 오래라 숲이 우거져 못 간다.”
듣던 얘기와는 딴판이다. 검은 흙과 약간의 자갈로 시작된 ‘신작로’ 길에 참나무 낙엽들이 예쁘게 깔려 있다. 그러던 것이 고갯마루에 가까워지면서 마른 풀잎줄기, 가는 나무줄기들이 길을 덮기 시작한다. 공이동 쪽으로는 우거진 덤불이 이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여름엔 정말 어렵겠다. 지금은 겨울이라 길 흔적이 분명하다.
살미면 공이동과 수안보면 고운리 사이에 있는 갑둥이재. 예전에 공이동 사람들이 수안보장을 보러 넘어 다니던 고개다. 공이동에서 갑둥이재를 넘어 고운리, 고운리에서 직마리재를 넘어 수안보. 이고 지고, 어울려 가다 쉬고, 두런두런 주고받는 얘기가 끝이 없었을 장 길 행렬이 선하다.
지난 11월, 이 길을 걸으려고 수안보에서 출발했을 때, 직마리재에서 고운리 마을로 내려서지 않고 공이동으로 곧장 갈 요량을 하다가 엉뚱하게 꼬부랑재를 넘어 송계 계곡으로 빠진 적이 있다. 몇 년 전 여름에는 공이동에서 수안보를 향해 가다가, 우거진 숲과 이리저리 엉킨 덤불을 뚫지 못하고 고운리로 빠진 적도 있었다. 그 땐 저쪽 능선을 넘었었지. 둘 다 어림짐작으로 ‘대~충’ 하다가 그리된 것이다. 그럴 적마다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 뿐이다.
꼬부랑재를 넘은 날 저녁에, 1:50,000 지도에서 갑둥이재를 넘는 소로를 찾아놨었다. 마침내 오늘, 엊그제 ‘고래를 잡은’ 녀석을 도와 병원엘 다녀오고 나니 한가하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고운리에서 공이1리 마을 한 복판까지 한 시간 거리. 왕복하니 꼭 두 시간이다.
이래저래 세 번째 찾은 공이동이 제법 눈에 익어온다. 시냇가로 이어지는 길은 이 마을 간선도로이다. 그윽하게 이어지는 고샅길, 작지만은 않은 골짜기를 덮고 있는 하늘, 여기저기 널려 있는 논과 밭, ‥‥‥. 집 뒤에, 논두렁에, 밭가에 서있는 감나무에는 아직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빨갛던 색깔이 검붉게 변했고, 고욤처럼 동글동글한 채로 달려 있는데, 간혹 어린애 불알 늘어지듯 쳐진 것도 있다.
세 번 방문에 고향인 듯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공이동. 낟가리로 쌓아 두었던 콩을 경운기에 실어 나르는 사람도 있고, 집 마당에서 도리깨로 콩 타작을 하는 사람도 있다. 빈손으로 온 터라 목이라도 축이려고 구판장을 물으니 없단다. 아래 위, 곳곳에 퍼져 있는 민가 수가 꽤 될 것이고, 경로당도, 마을 회관도 두어 곳 보이고, 교회도 있고, 폐교가 됐다지만 학교 건물도 번듯하게 있는데, 가게는 없다. 교통수단이 빠르고 편리해진 탓이리라. 스테인리스 대접에 냉수를 떠다 주는 아주머니 인심이 푸근하다. 시어머님인 듯한 할머니는, 도리깨질에 튀어나가는 하얀 콩알맹이를 줍다가 맑은 웃음으로 인사를 받으신다.
공이동 사람들이 수안보장을 보러 갈 때 넘던 갑둥이재. 아직도 신작로가 뚜렷한데 사람들 머리 속에선 초목이 우거져 다니지 못하는 길이 되고 있다. 그렇게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잊혀지는 것일까?
(200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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