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밥골

2008. 2. 27. 10:43충청

2007년 추석 이브.

산은 검은 몸짓으로 곡선을 그리고

허공은 달빛을 받아 교교한데

한 나그네가 발길을 멈추고 문을 두드린다.

매현에서 궁골을 지나, 서낭고개를 넘고, 소용골 입구 못미처에

예전에 없던 집이 한 채.

뜻밖의 객을 맞아 당황하는 사람들은

근 십 년 전에 낙향하여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한 가족 네 식구.

가장은 나그네의 초등학교 적 친구다.

집이 들어서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곳에

집이 들어서고 골짜기 이름이 되살아난다.

지나가다가 밥이나 먹고 가자고 한 골짜기라서 ‘지나밥골’

길 건너 저쪽, 여남은 채 마을이 예부터 숨어 있는 골짜기는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오른 못이 있다고 해서 ‘소용’이라고 들었거늘

오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쉬었다 가는 곳이라고 해서 ‘쉬엄골’이라는.

복숭아를 깎고 송편을 담는 데다 대고,

“술은 없나?” 하니,

풍기에서 사다가 담갔다는 홍삼주를 내놓는다.

한 잔 받으면서 객쩍게 지껄인다.

“지나가다가 술 한 잔 먹고 가는 곳”으로 바꾸자고.

‘지나술골’이라고 할까, ‘지나주골’이라고 할까.

홍삼주 진한 향기에 정신이 몽롱하니 달빛은 더욱 밝고

나그네 발길은 환한 어둠속에 스며든다.

(200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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