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걷는다[문경-충주]

2008. 2. 27. 11:28동서남북

2006년 6월 9일 늦은 일곱 시. 열흘 전에 문경 터미널 정원에 꽂아 놓았던 붉은 깃발을 뽑아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한 식당에 들어 저녁밥을 먹고 떠난다. 유, 최, 임, 이. 이, 차, 임, 신, 임. 김, 이.


충주-울진, 충주-만리포에 이어 남해 미조항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길. 미조항-삼천포-진주-산청-거창까지 나흘, 거창에서 김천까지 이틀, 김천-상주 하루, 상주-문경 하루. 요번엔 이틀을 걸어 문경에서 충주까지 간다. 곱 이상으로 늘어난 일행은 숫자만큼이나 기세가 있고 당당한데, 간간이 터지는 번개와 천둥이 겁을 준다. 요란한 거에 비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빗방울이 몇 개씩 떨어지고, 구름을 밀치며 나타나는 달님이 살짝 살짝 인사를 한다.


문경읍 고요리에서 옆길로 빠져 팔영리로 들어설 때, 애초 작정했던 길이 아니라는 걸 속으로 알았다. 그러나 달빛 은은한 산속 바람에 취하여 그냥 걷는다. 그까이꺼 좀 돌아가지 뭐.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 한 구석에 있다. 이따금 반짝이는 반딧불이 가슴을 건드린다. 좋다~!


갈평리, 신북종합복지관 앞에서 모여 좀 쉬었다가 간다. 이젠 환한 달밤, 관음리를 지나 하늘재다. 월항삼봉과 포암산 사이에 있으면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가 되는, 백두대간의 고개. 남쪽에 있는 마을이 경상도 땅 관음리이고, 그 너머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념주를 한잔 하고 가는 걸 꼭 속되다고 해야 할까? 어김없이 한잔 한다. 캬~!

 

젠 비 맞을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 저 쪽 산 위에 둥근 달이 또렷하다. 밝은 달빛에 온몸을 씻고, 맑은 밤공기에 마음을 씻는다. 동천석실에 앉아 다섯 벗을 노래하는 윤선도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건너편 동산(東山) 위에 떠오르는 보길도의 달을 그려본다.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수석)과 松竹(송죽)이라.

東山(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

‥‥‥

자근 거시 노피 떠서 萬物(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에 光明(광명)이 너만 한니 또 잇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 오우가(五友歌)/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하늘재는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척한 고개라고 한다.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강 물길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요로가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북에서 남쪽을 향할 때도 그럴 게 아닌가?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이 하늘재를 차지하기 위해 끈질기게 전쟁을 일으켰고,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던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함께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저 아래 덕주산성과 덕주사, 덕주봉, 마애불 등에 서려 있는 오누이의 사연은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 주고 있다.


왜 하늘재라고 했을까? 이 선생님 왈,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가려면 하늘나라를 거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럴 듯한 말씀이다.


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있는 관음리와 미륵리. 관음은 관세음보살의 준말이고, 관세음보살은 '모든 곳을 살피는 분' 또는 '세상의 주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모든 환난으로부터 현세를 지켜준다고 한다. 미륵은 미륵보살의 준말로 도솔천에 살며, 오십육억 칠천만 년 후에 미륵불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미륵보살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관음리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재는 곧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는 얘긴가? 오월 열나흘 보름달이 “만물을 다 비추며” 말없이 떠 있다. 관음보살의 미소인가? 아니면 미륵보살인가?


관음리 길은 포장도로인데, 하늘재 너머 미륵리로 가는 길은 흙길이고 숲 속에 묻혀 있다. 내세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그런가? 그렇게 내려오니, 석불입상을 비롯한 석탑과 석등, 용두, 사자상, 마의태자가 갖고 놀았다는 공깃돌 모양의 바위 등이 달빛 아래 고요하다. 내세를 꿈꾸던 흔적들인가?


미륵리에서 잠깐 누웠다가 눈을 뜨니 6월 10일 새벽. 지릅재를 넘어 수안보에서 아침을 먹는다. 미사모 여섯은 차가 운전하는 차로 떠나고, 유, 최, 신, 임, 이, 다섯 명이 걷는다. 토토계리 강둑에 앉아서 막걸리 병을 기울이며 산천을 희롱하다 또 걷는다. 싯계 마을을 지나 귀골에 있는 식당에서 매운탕 점심을 먹고 또 걷는다. 유주막 삼거리에서 도장골로 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냥 맞기에 딱 좋을 만큼 내리니 기분 좋게 맞으며 계속 걷는다. 호암동 범바위슈퍼 앞에서 멈춘다.


범바위 슈퍼, 충주시 호암동 범바위 마을에 있다. 저 쪽 산기슭에 범 모양을 한 바위가 바라라다 보이는 슈퍼 앞. 2004년 1월에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울진으로 떠났던 그곳이다. 충주중학교 선생님들이 남산-계명산을 종주할 때 출발하던 곳이다. 남쪽 길을 끝내는 지금, 여름비가 내리고 있다. 시원한 여름비. 지난 1월 31일 미조항에서 출발할 때, 그 때는 봄비가 내렸다.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읊조렸다. 이은하가 부른 봄비라는 노래를 흥얼거렸었다. 봄비를 맞으면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뭇 생명의 원천인 물을 생각하면서 시작한 걸음을 오늘, 6월 10일 여름비를 맞으면서 일단 접는다. 북쪽 압록강까지의 길을 그리면서.

(200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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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터미널(6월 9일 19:00)-교촌리-요성리-화계리-팔영리-비지재-평천리-갈평리-황정-하늘재(23:30)-미륵리(1박/10일 06:10출발)-지릅재-미륵사(권선)-수안보(아침식사)-원통-돌고개-문강-토계-팔봉-싯계-호림산장(점심)-유주막-도장골-관주골-범바위(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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